조선, 부패로 망하다 (53) - 북양함대 궤멸과 시모노세키 조약
조선, 부패로 망하다 (53) - 북양함대 궤멸과 시모노세키 조약
  • 김세곤 호남역사연구원장
  • 승인 2021.11.29 08:45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1894년 10월 25일에 일본군은 압록강을 건너 요동 반도에 상륙하여 11월 8일에 대련, 11월 22일에 뤼순을 함락시켰다.

춘범루 (일본 시모노세키)
춘범루 (일본 시모노세키)

북양함대는 이미 산동 반도의 웨이하이웨이로 이동한 후였다. 그런데 일본군은 뤼순에서 중국인을 대학살하였다. 심지어 여자와 어린이 불문하고 모조리 죽였고, 도시는 거대한 도살장으로 변했다.

미국의 <뉴욕 월드>는 11월 28일 기사에서 6만 명이 살해되었고 생존 주민은 36명에 불과했다고 보도했다. <월드>의 제임스 크릴만 기자는 “일본은 지금 문명의 가면을 벗고 야만의 모습을 드러낸 괴물”이라고 맹렬히 비난했다.

한편 일본군은 12월 16일에 복주를 점령하고 산해관 방면으로 계속 진격했다. 북경 점령도 멀지 않은 것이다.

전황이 극히 불리해지자 청나라는 호남 순무 소유렴과 호부시랑 장음환을 전권대신으로 일본에 파견하였다. 회담 장소는 히로시마였다. 그런데 일본은 회담을 거절했다. 예상을 뛰어넘은 승전을 하고 있는 마당에 강화 회담에 응할 이유가 없었다.

1895년 1월 25일에 일본군은 웨이하이웨이(威海衛)에 있는 청국의 북양함대 해군기지를 공략하였다. 1월 30일에 남쪽 방포대를 함락시킨 일본군은 2월 1일에 북쪽 방포대를 파괴했다. 이로써 청군은 웨이하이웨이의 육상 거점을 완전히 잃었다.

2월 4일 밤에 해전이 시작되었다. 일본 연합함대와 청나라 북양함대의 공방전이 밤새도록 이어졌다. 양측의 함선 다수가 격침되는 치열한 전투 끝에 일본 해군은 2월 8일에 류공다오를 장악했고, 2월 9일에는 북양함대가 자랑하는 정원(靖遠)호를 침몰시켰다.

2월 12일 생존한 북양함대의 군함에서는 외국 고용인들이 반란을 일으켜 일본에 투항할 것을 협박했다. 결국 잔존한 북양함대는 일본군에 항복했고 북양함대 사령관 정여창은 자결했다.

북양함대의 남은 함선인 진원, 제원, 평원, 광병, 진변, 진중, 진북, 진서, 진동, 진남 등 15척은 고스란히 일본 연합함대에 인수되었다.

북양함대 패전은 부패 때문이었다. 여제(女帝) 서태후가 60세 회갑을 맞아 북경의 이화원을 중수하느라 해군 예산을 몽땅 쓴 것이다. 북양함대에는 포탄이 단 세 발밖에 없었다 한다.

1895년 3월에 일본군이 베이징으로 진격한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다급해진 청나라는 이홍장(李鴻章 1823∼1901)을 전권대신으로 교체하고 강화 회담 재개를 서둘렀다. 3월 19일에 시모노세키에 도착한 이홍장은 20일부터 아카마 신궁 옆에 있는 복 요리점 춘범루(春汎樓)에서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 1841∼1909)와 강화회담을 개시하였다. 청국 측 대표는 이홍장,이경방(이홍장의 양자), 오정방, 일본은 이토 히로부미와 무쓰 외상이었다.

이날 이홍장과 이토 히로부미는 1885년 4월에 중국 천진에서 만난 후, 꼭 10년 만에 다시 만났다. 그런데 지금은 청-일 양국의 입장은 완전히 달라져 있었다. 이홍장은 회담을 시작하자마자 휴전을 제의했다. 하지만 이토는 논의해보겠다면서 느긋했다.

3월 20일에 이홍장은 춘범루 근처인 인접사(引接寺)로 숙소를 옮겼다. 73세의 이홍장은 배에서 생활하는 것을 힘들어했다.

3월 21일에 제2차 회담이 속개되었다. 이번에도 의제는 휴전이었다. 이토는 휴전 조건으로 천진과 산해관을 일본에 양도할 것 등을 제시했다.

3월 24일에 제3차 회담이 열렸다. 이 날 이홍장은 휴전은 거론 안 하겠으니 강화 문제를 논의하자고 했다. 이토는 다음 날 강화조건을 제시하겠다고 답했다. 회담을 마친 이홍장은 숙소인 인접사로 향하였다. 이홍장이 탄 가마가 모퉁이를 막 돌 때였다. 갑자기 괴한 한 명이 달려들어 권총을 발사했다. 탄환은 이홍장의 왼쪽 광대뼈 아래를 뚫고 들어가 왼쪽 눈 밑에 깊이 박혔다. 다행히 생명에는 지장이 없었다. 총탄이 금테 안경에 맞은 것이 행운이었다.

저격범은 26세의 극우주의자였다. 그는 ‘강화하면 안 된다. 이참에 중국 을 식민지로 삼아야 한다.’고 주장하며 이홍장을 저격한 것이다. 일본은 발칵 뒤집혔다. 일본을 야만국이라고 비난할 것을 우려한 메이지 천황이 성명을 발표하고 육군 군의총감을 보내는 등 법석을 떨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