숲에 도토리를 심다
숲에 도토리를 심다
  • 문틈 시인
  • 승인 2021.10.20 21: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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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 전 아파트 단지 뒤켠 작은 숲에 가서 도토리를 심었다. 도토리 심기는 올해 들어 품어온 내 숙원 사업이었다. 내가 심은 도토리는 상수리나무가 아니라 갈참나무 열매다. 가으내 숲을 뒤지다가 가보지 않은 곳에 모양이 길쭘하니 마치 장식용 단추처럼 생긴 도토리들이 우수수 떨어져 있는 것을 발견했다.

날마다 그 갈참나무 밑에 가서 도토리를 주워 모아 500여 개의 도토리를 심게 되었다. 도토리는 봄에 심어야 한다며 동생이 열심히 내게 말했지만 내 생각은 달랐다. 올 가을 떨어진 도토리를 내년 봄에 심는다는 것은 어딘가 내 귀에는 아귀가 맞지 않게 들렸다.

왜냐하면 이것은 숲의 비밀일지도 모르겠는데 그해 가을의 도토리는 그해 가을 떨어져 땅에 스며들어 잠자고 있다가 다음해 봄에 싹을 내밀지 않을까. 이것이 자연의 이치로 생각되어서 나는 자연의 이치를 따르기로 했다.

갈참나무는 내 생각컨대 한해 가을에 적어도 몇 천 개의 결실을 내놓는 것 같다. 성서는 농삿일에서 30배, 60배, 100배의 결실을 거둔다고 작물 이야기를 하고 있지만 도토리는 한해 몇천 배의 결실을 내놓는다. 누가 부러 가꾸지 않아도 저 혼자 그런 풍요를 만들어낸다.

나는 이 문제도 골똘히 생각해보았는데 썩 재미있는 결론을 얻어냈다. 만일 갈참나무가 결실한 수천 개의 도토리들이 땅에 묻혀 모두 싹을 낸다면 숲은 오래지 않아 다른 나무들을 숲에서 쫓아내고 온통 갈참나무숲으로 되고 말 것이다.

그러지 말라고 갈참나무는 자연으로부터 비밀 미션을 부여받은 것처럼 보인다. 그것은 열매의 대부분은 다람쥐나 새나 그런 것들에게 먹이로 내주고 나머지 아주 조금만 대를 이을 자손으로 키우라는.

갈참나무 밑에 떨어진 도토리들은 제 힘으로는 옮겨갈 수가 없다. 큰 나무 밑에 작은 나무가 자라지 못한다는 것은 상식인데 갈참나무가 이걸 모를 리가 없다. 그렇다면 갈참나무는 땅에 떨어뜨린 도토리를 누가 옮겨 심어주기를 바라는 것일까?

이때 다람쥐란 놈이 나타나 도토리, 밤 같은 열매를 입에 담아 여기저기 땅을 파고 숨겨 놓는다. 그러고는 숨겨놓은 열 개 중 서너 개는 깜빡 생각나지 않아 잊어버리고 마는데 그 다람쥐가 찾지 못한 먹이들 중에 몇 개가 싹을 내밀어 나무의 자손을 이어간다. 숲은 우리가 잘 모르는 이런 기묘한 무슨 계약 같은 것을 서로 맺고 있는 것이다.

내가 심은 수백 개의 도토리들이 내년 봄에 다 싹을 내밀까. 그러면 숲은 어떻게 될까. 공연한 걱정이고 놀라움이다. 숲이 그렇게 멍청하지 않다. 내가 숲에 심은 도토리는 무슨 까닭인지는 모르지만 잘해야 열 중 하나만 싹을 내밀고, 싹을 내민 것들 중에서도 또 열에 다섯은 벌레에 먹히거나 밟혀 죽고 가까스로 1백 개 중 겨우 다섯 개가 살아남으면 대성공이다.

자료를 찾아보니 그렇다. 이렇게 자손 번식률이 낮기 때문에 갈참나무는 수수처럼 열매를 무지막지하게 맺어내는 것이다. 프랑스에서 어떤 양치기 노인이 헐벗은 산에 매일 100개씩 열매를 심었다. 30년간 20만 개의 열매를 심었는데 그 가운데 2만 개가 싹을 내밀었다. 헐벗은 온 산이 숲으로 바뀌었다. 이건 대단한 결과다. 나도 그런 심정으로 도토리를 심은 것이다.

도토리를 심고 나서 바로 다음날부터 비가 왔다. 나는 지금 땅 속에 파묻혀 촉촉이 빗물을 머금고 내년 봄을 기다리고 있을 도토리들을 생각한다. 괜히 기분이 좋다. 신비스러운 세계와 인연을 맺은 기분이다. 저 숲에 내가 심은 도토리들이 겨울잠을 자고 나서 내년 봄에 푸른 싹을 내밀 것이라고 생각하니 나도 모를 기쁨이 내 온몸을 감싼다.

내가 심은 도토리는 다람쥐가 심은 것이 아니어서 누가 파낼 리는 없겠지만 자연이 알아서 얼마나 싹을 내밀지 결정할 일이다. 나는 단 한 개의 도토리가 싹을 내밀어도 기뻐할 준비가 되어 있다.

그 나무가 자라고 자라서 숲을 이루고 열매를 맺고 해마다 수천 개의 도토리를 떨어뜨리고 다람쥐와 새가 날아오고…. 내가 숲에 한 일을 아무도 모른다고 생각하니 더욱 기쁘다. 나도 갈참나무처럼 숲의 일원이 된 기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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