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부패로 망하다 (46) - 고종, 지석영 상소에 심드렁하다.
조선, 부패로 망하다 (46) - 고종, 지석영 상소에 심드렁하다.
  • 김세곤 호남역사연구원장
  • 승인 2021.10.12 08:5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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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4년 1월 10일(양력 2월 10일) 고부군수 조병갑의 탐학에 분노해 전봉준이 이끄는 농민들이 봉기했다. 1874년부터 1894년까지 20년간 정권을 잡은 민씨 척족들의 부패에 저항한 것이다.

지석영 집터 (종로구 운현궁 근처)
지석영 집터 (종로구 운현궁 근처)

전봉준이 이끄는 동학 농민들이 4월 27일에 전주성을 점령하자 고종과 민왕후는 청나라에 군대를 요청하였다. 1882년 임오군란 때 청나라에 군대를 요청한 ‘외세의존병’이 또다시 도진 것이다.

박은식은 『한국통사』에서 이렇게 적었다.

“임금과 왕비가 스스로 해결하지 못하고 청나라 군대를 불러서 자기 백성을 진압하려 했으니 이게 제정신인가?”

6월 초에 청군이 아산에 도착했고 천진조약에 의거하여 일본군도 인천에 들어왔다. 6월 11일에 동학농민군은 전라감사와 화약(和約)한 후에 해산했다. 하지만 일본군은 물러나지 않고 6월 21일 새벽에 경복궁을 점령했다. 6월 22일에 김홍집 친일 내각이 들어섰고 대원군이 다시 전면에 나섰다. 민영준·민형식 등 민씨 척족들은 황급히 서울을 떠났다.

7월 5일에 종두법으로 유명한 전(前) 형조 참의 지석영이 상소하였다.

"오늘 우리 백성들의 마음에는 두 가지 병통이 있는데 하나는 원망하는 마음이고 하나는 분개하는 마음입니다. 강제로 거두어들이는 정사에 지쳐서 원망하는 마음이 생기고, 쌓인 원망을 해소시킬 방법이 없으니 분노의 마음이 생기는 것입니다.

또 백성의 마음에는 두 가지 병이 있으니 하나는 청나라를 두려워하는 마음이고 다른 하나는 일본을 의심하는 마음입니다.

지금 백성들의 민심은 정사를 전횡하고 임금의 총명을 가리며 백성을 수탈하여 소요를 초래하고 청나라 원병(援兵)을 불러들이게 만들며 난(亂)이 일어나자 먼저 도망친 간신 민영준과 신령의 힘을 빙자하여 임금을 현혹시키고 기도한다는 구실로 재물을 축내며 요직을 차지하고 농간을 부린 요사스러운 계집 진령군(眞靈君)에 대하여는 온 세상 사람들이 그들의 살점을 씹어 먹으려고 합니다.

아! 저들의 극악한 행위가 아주 큰 데도 한 사람은 귀양을 보내고 한 사람은 문책하지 않으며 마치 아끼고 비호하는 것처럼 하니 백성들의 마음이 어찌 풀리겠습니까. 삼가 바라건대, 빨리 상방검(尙方劍)으로 두 죄인을 주륙하고 머리를 도성문에 달아매도록 명한다면 민심이 비로소 상쾌하게 여길 것입니다. ” (고종실록 1894년 7월 5일)

이러자 고종은 "원래 참작한 것이 있다."고 비답하였다. 지석영의 상소를 내심 불쾌하게 여긴 것이다.

이로부터 10일 뒤인 7월 15일에 군국기무처(軍國機務處)에서 의안을 올렸다.

“죄인 민영준은 권력을 마음대로 농단하여 임금을 속이고 백성을 학대하였으며 요사스러운 여자인 김창렬의 어미(진령군)는 신령에 가탁하여 화복의 권한을 조종하였는데도 주륙하지 않으니 여론이 물 끓듯 합니다. 그리고 달포 전에 형조 참의 지석영이 상소를 올렸지만 아직도 윤허하는 처분을 받지 못하였으니 참으로 답답하기 그지없습니다. 이것은 지석영 한 사람의 말이 아니라 바로 온 나라 공동의 공론(公論)이니 마땅히 잡아다가 엄하게 조사해서 그 죄를 엄격히 다스려야 할 것입니다.

모두 해당 형률을 적용하여 귀신과 사람의 분노를 풀어주어야 합니다.”

이에 대해 고종은 "아뢴 대로 윤허한다."고 답했다.

하루 뒤에 군국기무처에서 진령군, 민영준 등에 대한 처벌 등의 의안을 올렸다. (고종실록 1894년 7월 16일)

“김창렬의 어미인 요사스러운 여자의 죄를 다스리라는 처분을 이미 받았으니 좌포청과 우포청에 명하여 기한을 정하여 체포해야 합니다. 그런데 죄인 민영준과 민형식의 일에 대해서는 아직도 윤허하지 않으니 답답하기 그지없습니다. 빨리 전하의 마음을 돌려서 여론에 부응해야 할 것입니다."

이에 고종은 "공론(公論)이 그러하니 응당 처분을 내리겠다."고 비답하였다.

고종은 마지못하여 무당 진령군과 민영준을 처분하겠다고 답변하고 있다. 진령군은 민왕후가 ‘언니’라고 부른 비선실세이고, 민영준은 고종과 민왕후가 가장 신임하는 민씨척족이니 고종이 이들에게 처벌을 명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그런데 황현의 『매천야록』에 의하면 진령군은 충주로, 민영준은 평안도로 ,민영익은 홍콩으로 이미 도망쳐 버린 상태였다. 조정은 뒷북만 치고 있었다. (황현 지음, 임형택 외 옮김, 역주 매천야록 상, p 371-372)

결국 1895년 8월 을미사변으로 민왕후가 일본인 낭인에 의해 시해되자 진령군은 그 충격으로 절명했다는 소문만 떠돌 뿐, 그녀의 최후는 밝혀지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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