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닷가에서 주운 소라껍질
바닷가에서 주운 소라껍질
  • 문틈 시인
  • 승인 2021.10.06 10: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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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상 한 귀퉁이에는 지난 여름 바닷가에서 주워 온 소라껍질 몇 개가 놓여 있다. 겉에 줄무늬가 그어져 있는데 작고 앙증맞은 모양이 흡사 손재주가 뛰어난 사람이 진흙으로 구워낸 도자기 같은 느낌을 자아낸다. 소라의 입구는 안으로 나선형 계단을 이루며 둘둘 말려가면서 점점 좁아져 맨 꼬리에 다다라 더 이상 갈 수 없는 막다른 지점을 형성하고 있다.

그러나 아무리 호기심 많은 눈길이라도 미궁 같은 소라껍질 속으로 더 이상 따라 들어갈 수는 없다. 무한천공의 우주에서 작은 별이 탄생하는 것과 같은 소용돌이가 몇 번이고 소라껍질 안에서 굽이치다가 미궁으로 난 길은 휘돌아 말려 어둠 속으로 사라진다. 이것이 소라껍질의 내부구조다.

소라껍질 속의 미궁을 끝까지 가보려면 아무래도 나는 저 파도의 한 자락이 되어야만 하리라. 나는 소라껍질을 들고 푸른 바다를 바라본다. 수많은 파도들이 결혼식장으로 막 들어오는 신부의 흰 드레스 자락 같은 거품을 일며 아득한 수평선 너머에서 달려온다. 달려와서는 바닷가 모랫벌에 드레스를 벗어던진다.

잇대어 파도들이 오고, 또 오고 …. 이 작은 소라껍질은 대체 어느 파도에서 태어난 것일까. 아니다, 모든 바다가 이 소라껍질에서 태어난 것만 같다.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의 어느 바다인들 빈 소라껍질 속으로 들어가보지 않은 바다는 없을 것이다. 이것은 수사가 아니다.

만일 컵 하나에 빨간 물을 부었다가 다시 바다에 붓는다면 놀라지 말라, 세계의 어느 바다에서든 바다를 컵으로 떠올리면 그 컵 속의 바다에는 여덟 개의 빨간 물분자가 들어 있다는 과학자의 세심한 증언도 있다.

사실 이 소라껍질은 한낱 작은 생명이 사라진 잔해에 불과하지만 이 안에 거대한 바다가 들어 있었다고 상상해보면 갑자기 더없이 소중하고 귀한 대자연의 유물 같다는 생각이 든다. 바닷가에는 소라껍질 말고도 갯고둥, 꼬막, 맛 같은 바다가 토해낸 빈 껍질들이 모래사장에 흩어져 있다. 어떤 때는 머나먼 남국의 야자열매가 발견될 때도 있다.

뿐만이 아니다. 바닷가 모랫벌에는 중국, 동남아시아, 그리고 어느 먼 나라, 그리스쯤에서 온 것인지도 알 수 없는 낯선 글자가 박힌 상품의 비닐봉지와 혹은 나무토막, 깡통, 패트병, 유리병들이 떠밀려 와 있을 때도 있다. 해류를 타고 바다와 바다와 바다를 떠돌다가 내가 찾아온 이 바닷가에 기착한 표류물들이다.

한낱 표류물에 지나지 않은 것들이지만 나는 이것들로부터 쉽게 눈길을 거두지 못한다. 그것들이 이 작은 해안가 모래 기슭에 떠밀려 오기까지 얼마나 먼, 천 갈래 만 갈래 물결의 항로를 타고 있었는지 모른다. 그것들은 수 만리 제 고향으로 헤엄쳐 돌아온다는 귀소본능이 있다는 연어도 아니다. 그저 이 표류물들은 바다의 등에 업혀 이 바다 저 바다로 떠돌았던 것이다.

빈 소라껍질을 귀에 대보면 먼 바다소리가 난다. 바다가 소라껍질의 미궁 속에 남겨 놓고 간 소리 같다. 나는 갯고둥이며, 꼬막껍질이며를 몇 개 더 주워 파도의 결이 곱게 새겨진 껍질들을 하나하나 살펴본다. 빈 깡통, 유리병, 비닐봉지들을 집어 들고 거기 새겨진 글자들도 들여다본다. 그리고는 아득히 먼 나라의 소식을 접하듯 바다 끝으로 눈길을 던진다.

해풍과 파도에 떠밀려 세계의 모든 바다를 떠돌았을 표류물의 탄생과 소멸에 얽힌 운명 같은 것이 떠오른다. 세상을 바다로 비유한 철인들, 한 걸음 더 나아가 아예 세상을 고해라고 설파한 성인도 있었다. 먼저 온 파도가 모래 기슭에 스러지면 잇달아 뒷 파도가 밀려온다. 이 천지가 없어질 때까지 바다는 저렇게 끊임없이 물결쳐 오리라. 사는 것이 설령 고통이라 할지라도 우리는 저 바다를 안고 뒹굴 수밖에 없는 일이다.

나는 한 개 소라껍질처럼 세파에 시달려온 마음을 비우고 쭈그리고 앉아 커다란 바다를 담았다가 소라껍질, 갯고둥, 꼬막 같은 빈 껍질들을 바닷물에 곱게 씻어 주머니에 넣는다. 머리칼을 흩날리는 해풍, 반짝이는 모랫벌, 대양의 가장자리로 밀려오는 푸른 파도가 세차게 내 존재감을 흔들어준다. 나는 알지 못할 격정으로 잠시 몸을 부르르 떤다.

하지만 곧 소라껍질과 표류물들을 생각하고 마음을 추스린다. 바다에 풍덩 뛰어들어 깔깔거리며 파도를 타고 생명을 만끽하던 사람들을 그려 보면서 나는 바다를 향해 손이라도 흔들어주고 싶다. 왜냐고? 무심한 여름바다의 잔등을 타고 놀았던 우리들도 결국은 바다의 저 작은 표류물의 하나에 지나지 않는다는 생각이 들어서다. 혹은 우리 몸뚱어리에 거친 파도의 결이 새겨진 빈 소라껍질이거나.

나는 책을 읽다가 밑줄을 그어 놓은 대목을 들춰보듯 이따금 바다에서 주워온 소라껍질을 들어 만져 보곤 한다. 우리는 모두 바다로부터 태어났다고 한 누군가의 말을 진정 믿을 수 있을 것 같다. 우리는 누구나 아득한 바다로부터 기착한 표류물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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