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부패로 망하다 (45) - 안효제, 무당 진령군을 탄핵하다가 귀양 가다.
조선, 부패로 망하다 (45) - 안효제, 무당 진령군을 탄핵하다가 귀양 가다.
  • 김세곤 호남역사연구원장
  • 승인 2021.10.05 09:04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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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3년 8월 21일에 전(前) 정언(正言) 안효제가 상소를 올려 무당 진령군을 처벌하라고 아뢰었다. (고종실록 1893년 8월 21일)

경복궁 건천궁
경복궁 건천궁

“근래에 와서 북관왕묘(北關王廟)는 거짓과 야박한 것을 숭상하고, 굿을 하는 것이 풍속을 이루어, 주문을 외우며 기도를 드리는 장소가 되었습니다.

요사이 괴이한 귀신이 여우 같은 생각을 품고 관왕의 딸이라고 거짓말을 하며 스스로 북관왕묘의 주인이 되어 요사스럽고 황당한 말로 사람들을 속이고 함부로 ‘군(君)’칭호를 부르며 감히 임금의 총애를

가로채고 있습니다.

또한 잇속을 늘이기 즐겨 하며 염치가 없는 사대부들을 널리 끌어들여서 ‘아우요, 아들이요’하면서 서로 칭찬하고 감춰 주며 권세를 부려 위엄을 보이거나 생색을 내니, 왕왕 감사나 수령들도 그의 손에서 나옵니다.

아! 신령을 모독하고 사당을 더럽히는 것이 이보다 더 심한 것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더구나 지금은 나라에 큰 변고나 하늘의 재난도 없고 또한 은나라 탕왕 때와 같은 큰 가뭄도 없는데, 무엇 때문에 기도하는 일을 자주 하는 것입니까?

겉은 마치 잡신을 모신 사당이나 성황당 같은데, 부처를 위해 둔 제단에서 무당의 염불 소리는 거의 없는 날이 없고, 걸핏하면 수만금의 재정을 소비하여 대궐 안에서의 재계(齋戒)와 제사와 관련한 일들을 마치 불교 행사를 하듯 하는 것은 무엇 때문입니까?

소경 점쟁이와 무당이 이 때문에 마음대로 돌아다니며, 중들의 요망스러운 교리가 이 때문에 제멋대로 퍼지며, 하인과 광대들이 이 때문에 떠들썩하게 지껄여 대고, 창고의 재정은 이 때문에 궁색하며, 관청 준칙과 관리 추천은 이 때문에 난잡하게 되고, 대궐 안은 이 때문에 엄숙하지 못하며, 형벌과 표창은 이 때문에 공명정대하지 못하고, 백성은 이 때문에 곤궁에 빠지며, 조정의 정사는 이 때문에 문란하게 되는데, 그 근원을 따지면 모두 귀신에게 제사를 지내는 것을 숭상하기 때문입니다.

아! 부당한 제사를 지내기 좋아하며 귀신을 모독하면서 복을 구하니 도리어 이런 죄를 짓는 것은 멸망하는 길입니다. 비록 일반 백성들 중에서 사리를 좀 아는 사람인 경우에도 이런 무리들에게 속지 않을 것인데 더구나 총명한 전하가 오히려 깨닫지 못하십니까?"

상소를 받아 본 승정원에서는 안절부절했다. 진령군은 고종 부부가 총애하는 무당이었다. 특히 중전이 ‘언니’라고 부르는 비선실세였다.

승지들은 상소를 고종에게 올려야 하는지에 대한 논쟁이 일어났다. 도승지는 이를 결정하지 못해 정권 실세 민영준에게 여쭈는 해프닝도 있었다. 이러다 보니 민영준이 ‘도도승지(都都承旨)’라는 말도 떠돌았다.

결국 상소는 고종에게 올리지 못했지만, 상소의 사본이 서울 장안에 널리 퍼졌고 고종과 민왕후도 읽어보았다.

안효제의 상소를 읽은 민왕후는 크게 노하여 손바닥으로 책상을 치면서 “이런 말을 한 자를 모두 죽어버려야 분이 풀리겠다.”고 말하였다.

이러자 고종이 위로하였다. “조정의 법이 일찍이 상소한 사람을 함부로 죽인 적이 없소. 지금 죽이자면 죽일 수는 있겠지만 이러면 세자가 무엇을 본받겠소?”

민왕후는 고종의 말이 세자를 위한 것이라고 여겨 노여움이 조금 풀렸다.

이러자 여러 신하들이 안효제를 처벌하라고 탄핵했다. 특히 고종의 사주를 받은 정언 김만제는 안효제를 처벌하라고 상소하였다. (고종실록 1893년 8월 21일 8번째 기사)

"전 정언 안효제로 말하면, 조금도 거리낌 없이 말을 가리지 않았으니, 감히 기도를 드리는 문제를 어찌 무엄하게 거리낌 없이 말할 수 있습니까? 전하를 지적하고 귀신을 모욕하였으며, 더구나 ‘난망(亂亡)’이라는 두 글자는 신하로서는 입 밖에 낼 말이 아닌데 그렇게까지 말하였습니다. 국문하소서.”

이에 고종은 8월 23일에 안효제를 추자도로 귀양 보내 위리 안치하였다.

이어서 고종은 승정원에 지시했다.

“오늘 이후로 나랏일에 대한 상소는 올리지 말라.”

(황현 지음·임형택 등 옮김, 역주 매천야록 (상), p 325-326 )

이후 사대부들은 말을 조심하고 바둑이나 두고 술이나 마시면서 우스갯소리로 소일하였다. 이렇게 언로가 막혔으니 나라가 망할 수밖에. (박은식, 한국통사, 동서문화사, 1987, p 4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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