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부패로 망하다 (43) - 민씨 정권 10년(1884-1894)
조선, 부패로 망하다 (43) - 민씨 정권 10년(1884-1894)
  • 김세곤 호남역사연구원장
  • 승인 2021.09.13 09:1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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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84년 10월 17일에 일어난 갑신정변은 ‘3일 천하’로 끝났다. 김옥균 ·박영효 · 서재필 등은 일본으로 도망갔다.

경복궁 건천궁
경복궁 건천궁

갑신정변을 계기로 민씨들은 더욱 똘똘 뭉쳐 권력을 독점했다. 민영익 ·민영준·민영소·민영환 등이 권력의 중심에 섰고, 민형식·민응식 등 몇 사람이 감쌌다. 요직이란 요직은 민씨들이 다 차지했다.

장도빈은 『한국 말년사』에서 이렇게 적었다.

“이에 민당(閔黨)은 전성을 극하여 당시 사람의 말에 ‘민가가 아니면 사람이 아니라’ 할 만큼 민왕후의 일문(一門)은 원근을 막론하여 모두 요로에 등용하여 문무백관과 수령방백을 민가의 일파로 나열하고 민가 일파는 나라 재물과 백성 재물을 흡수하여 조선의 부(富)는 민족(閔族)의 부로 변하고 말았다.”

민씨 정권의 선두 주자는 민영준(1901년에 민영휘로 개명)이었다. 그는 1887년 12월 15일부터 1889년 11월 8일까지 2년간 평안감사를 했는데, 고종에게 금송아지를 바쳤다.

이러자 고종은 낯빛이 변하더니 이전 평안감사 남정철을 꾸짖었다.

“남정철은 정말로 도둑놈이었구나. 평안도에 이처럼 금붙이가 많았는데 혼자서 다 해 먹었구나.”

1888년에 왕실은 매일 여는 연회와 세자의 복을 비는 기도를 계속했다. 하사품은 늘어날 날뿐 줄어들지 않았다.

특히 궁중은 임오군란과 갑신정변을 겪으면서 어두운 밤에 사고가 날 것을 우려하여 1887년 1월부터 들어온 전기를 매일 환하게 켜놓았는데 이 비용도 만만치 않았다.

한편 1890년 3월 27일에 선혜청 제조에 임명된 민영준은 온갖 방법으로 돈을 긁어모았다. 국고가 이미 바닥이 나서 비용을 마련할 수단이 없자, 우선 광산 개발과 석탄 채굴의 이권을 챙기기도 하고, 생선 · 소금 · 구리 · 무쇠 등 시장에서 유통되는 모든 물건에 세금을 매겼다. 더 나아가 홍삼 매매를 독점하고 민영익을 시켜 중국에 팔아 이익을 챙겼다. 이렇게 하고도 돈이 부족하자 서양과 일본에서 차관으로 돈을 빌렸는데 그 액수가 어마어마했다.

이것으로도 모자라 민영준은 관찰사와 수령 자리를 해마다 교체했고, 매달 5-6차례 이조와 병조의 인사담당자를 불러 미리 뽑아둔 전국의 부자들에게 참봉·도사·감역(監役 건축 토목공사 감독)과 같은 초임(종9품) 벼슬자리를 팔도록 지시했다.

이러다 보니 충청도의 늙은 과부가 데리고 사는 복구(福狗)라는 개에게 감역 벼슬을 파는 해프닝도 생겼다.

민영준은 인사회의 때마다 증직(贈職 나라에 공을 세우고 죽은 관리에게 벼슬을 하사하는 일)과 정려(旌閭 충신·효자·열녀를 표창하는 일)를 남발했다. 전라도 태인 부자인 유사현이 죽자, 그 후손이 조정에 수십 만 냥을 바쳤다. 이러자 유사현이 학행이 있다 하여 판서와 제학을 증직하고 시호까지 주었다.

한편 관찰사와 유수 자리는 엽전 50만에서 100만 냥이었고, 지방 수령자리도 최하 5만 냥이었다.

이렇게 수령이 된 자들은 본전을 뽑기 위해 탐관오리가 되었다. 이들은 말로만 목민관이지 강도나 다름없었다. 지방 사정에 밝은 아전들 또한 빌붙어 간악한 짓을 자행하였다.

‘이렇게 민씨들의 가공할 만한 가렴주구는 1894년 동학농민항쟁 시까지 10년간 계속되었다.’ (이이화 지음, 한국사 이야기 18 민중의 함성 동학농민전쟁, p 152-153)

독립운동가 박은식도 『한국통사(韓國痛史)』에서 갑신정변 이후 10년간의 부패를 통렬히 비판했다.

“갑신정변 이후 10년간 내정의 부패가 극에 달해갔다. 외척들은 세력을 믿고 다투어 방자한 짓을 하고 탐욕과 사치를 일삼았다. 환관들은 왕의 은총을 도적질하여 마음대로 권력을 휘둘렀고, 시정 무뢰배가 정,관계 일에 간섭하고 다투어 거간꾼 행세를 하였다. 무당과 점쟁이 같은 요괴한 천류들이 은택(恩澤)을 더럽히고 음사(淫祀 부정한 귀신에게 제사 지냄)를 널리 확장하였다.

또한 큰 잔치를 거행하지 않은 해가 없었고 밤새도록 행한 연회가 낮이 되어도 그치지 않았으며, 광대와 기녀들이 백 가지 유희를 연출하였다. 주지육림에 허비된 비용이 수만금이나 되었으니, 그것은 모두가 백성의 피를 빨아 긁어모은 것이었다.

지방관리들은 모두 돈을 바치고 관리 노릇을 했다. 그래서 그물로 고기를 잡듯이 이득을 다 차지하는 것을 직으로 삼고, 게다가 연못까지 말려 고기를 잡아가듯이 남김없이 빼앗아 갔다.

백성들은 모두 생업을 잃고 원망이 하늘까지 치솟았는데 산간으로 도망하여 무리를 모아 관리를 축출하고 곳곳에서 봉기하였다. 이에 동학무리들이 시세에 편승하니 혁명 풍조가 무르익었다.” (박은식 지음 · 김승일 옮김, 한국통사, 범우사, 1999, p 132-1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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