능소화
능소화
  • 문틈 시인
  • 승인 2021.08.19 14: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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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릴 적 1백 가호쯤 되는 우리 마을 부잣집 마당에 키 큰 나무를 감고 올라가는 꽃이 있었다. 여름 한철 부티를 한껏 발산하며 피던 꽃. 귀한 모습을 하고 피었는데 마치 그 꽃은 그 집에서만 피는 것처럼 여겨질 정도로 우리 동네 다른 집에서는 볼 수 없는 꽃이었다. 그래서 우리는 부잣집 아들 이름을 붙여 그 꽃을 호영이네 꽃이라 불렀다.

주황색으로 단장한 긴 깔때기 모양을 한 그 꽃은 마치 수많은 등불을 켜놓은 것처럼 아름다웠다. 대처로 나가 살면서 그 꽃을 오래 잊고 살았다. 그 꽃을 나는 나이가 한참 들고 나서야 어느 날 내가 살던 도시에서 다시 만났다. 어찌나 반갑고 기뻤던지 콧등이 시큰했다. 타관을 떠돌 때 고향의 까마귀만 봐도 반갑다는 옛 사람의 말이 허사가 아니었다.

며칠 전 차를 타고 외곽도로를 달리다가 방음용 담벼락에 주황색 꽃송이들이 외야를 메운 야구 관중처럼 수대로 매달려 있는 모양을 보고 나는 단박에 알아보았다. 고향 마을 부잣집에 피던 그 꽃이었다. 운전대를 잡은 아내가 놀라듯 말했다. “저 능소화 좀 보세요. 여기 피어 있는 줄 몰랐어요.”

꽃 이름이 능소화라는 것을 처음 알았다. 이름이 범상치 않다. 능소화는 우리 조상들이 양반집에 피던 꽃이라 해서 흔히들 양반꽃이라고도 불렀단다. 실제로 평민들에게는 심지 못하게 했던 꽃이라 한다. 아내가 능소화 스토리를 말해주었다. 식물도감이며 인터넷을 뒤져 자세히 알아보았다.

능소화(凌霄花)라는 멋진 이름은 하늘에 닿도록 올라가 피는 꽃이라고 해서 붙여진 이름. 한자 이름 풀이를 그대로 해보면 하늘을 능가할 정도로 올라가 피는 꽃이라는 뜻이다. 능소화는 옛날 중국에서 온 꽃인데 여름에서 초가을까지 키 큰 나무나 담벼락을 타고 올라가면서 적황색 꽃을 피우는 덩굴나무다.

그러니까 능소화는 땅 속에 있을 때부터 밖에 나가면 다른 나무나 담벼락 같은 것에 의지해 타고 올라가며 살 궁리를 하고 있던 특이한 꽃나무다. 자력으로 꼿꼿이 서서 자라지 않고 반드시 누군가에게 의지해야만 살 수 있는 꽃이다. 영어로는 중국 트럼펫 덩굴식물(Chinese trumpet creeper)이라고 이름한다. 꽃 모양이 깔때기처럼 생겼고, 줄기를 감으며 올라간다 해서 그렇게 부른다. 미국에는 이 꽃보다 좀 더 작지만 더 붉은 미국 능소화가 따로 있다.

능소화는 가지에 흡착근(吸着根)이 발달하여 있어서 다른 물체에 딱 붙어 올라갈 때 중간중간에 뿌리를 박으며 안전하게 올라간다. 마치 등반가들이 암벽을 등반할 때 바위에 못을 박고 이를 딛고 올라가듯이. 꽃은 트럼펫 악기 모양으로 꽃받침 쪽이 길게 뻗어 있다. 한번 피기 시작하면 여름부터 초가을까지 피어 있다.

오래도록 피는 것 같지만 꽃들이 연달아서 피어서 그렇게 보일 뿐 개별꽃으로 보면 딱 이틀 피었다가 진다. 말하자면 집단체제의 꽃이다. 하나는 전체를 위하여 복무한다는 사회주의 논리가 지배하는 중국의 전체주의를 연상케 한다.

흔히 양지에서 잘 자라고 추위에 약하여 남부지방에서 핀다고 자료에는 나와 있으나 요즘은 서울 북부 지방에서도 핀다. 그만큼 우리나라 땅이 아열대 비슷한 기후로 변해가고 있다는 증거다. 해안가에서도 잘 자라고 공해에도 강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길래 수만 대의 차량들이 배기가스를 뿜고 내달리는 고속도로변에서도 아무렇지도 않게 피어 있다. 탁한 배기가스나 미세먼지 속에서도 주황색꽃들이 무리지어 피어있는 것을 보면 마냥 아름다움에만 홀려 있기가 겸연쩍어진다.

대도시에서는 관상용으로 공원이나 도로변에 심어놓아 요새는 능소화를 자주 목격할 수 있다. 지금은 고향 마을에도 이 집 저 집에서 볼 수 있지 않을까싶다. 최근에는 이 땅에 미국 능소화도 많이 심는다고 들었다. 어쩌면 꽃조차도 미국과 중국에서 온 능소화가 이 나라에서 서로 땅을 차지하고 피는지 그저 신기할 따름이다. 흡사 한반도의 지정학적 운명을 보여주는 꽃같기도 하다.

꽃은 그저 피어 있을 뿐 국적이 있을 까닭이 없다. 내가 몇십 년 만에 아름다운 고향 꽃을 보고 딴 생각을 한 것이 미안한 마음이다. 아득히 멀리서 난민처럼 온 꽃, 능소화. 늘 거기 등불처럼 피어서 이 땅을 환하게 비추어 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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