밥상보
밥상보
  • 문틈 시인
  • 승인 2021.08.12 13: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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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골에 사시는 어머니로부터 한 꾸러미 소포가 왔다. 소포를 뜯어보니 색깔이 다양한 네 모 반듯한 천 조각들을 잇대어 만든 예쁜 밥상보가 양파 무더기 한쪽에 곱게 포장되어 있다. 냉장고가 보급되고 나서 밥상보는 거의 쓰지 않는 옛 물건이나 다름없게 되었다.

하지만 어머니가 보내주신 밥상보는 거의 작품이라고 해도 좋을 정도로 마음에 쏙 들었다. 몬드리안의 작품을 능가할 정도라해도 과언이 아닐게다. 미술 교육을 받지 않은 시골 촌로라 대접을 받지 못할 뿐이다. 내 어릴 적 늘 보던 장면이 생각난다. 상차림을 해놓고 그 위에 밥상보를 살짝 덮어둔 밥상의 정겹던 모습. 그 시절을 떠올리며 밥상보를 펴놓고 한참 바라보았다.

밥상보는 자투리 천 조각들을 모아 재봉틀로 박음질을 해서 곱게 만들었는데 필시 90이 훨씬 넘어 눈이 어둡고 기력이 약하신 어머니로서는 품이 무척 많이 들었을 것 같다. 나는 멀리 떨어져 사는 아들로서 가까이 모시지도 못하고 날마다 안부전화로 아들 노릇을 해온 터에 이처럼 어머니가 직접 만든 수제품 선물을 받고 보니 콧등이 찡해왔다.

“어머님, 너무 좋은 선물을 보내주셨어요.”

시외전화로 몇백 리를 건너 답례인사를 하는 내 목소리가 조금 떨리게 나왔다.

“이제 좀 푹 쉬셔요. 밥상보를 만드시느라고 많이 힘드셨겠어요. 건강은 괜찮으셔요?”

그러자 어머니께서 말씀하셨다.

“괜찮다. 내가 이제 언제 세상을 뜰지 모르니 내가 생각나면 너희더러 보라고 밥상보를 만들어 보냈다.”

웃으시면서 하는 말씀이셨지만 나는 갑자기 숙연해졌다.

“자식들은 글을 쓴다, 그림을 그린다, 남겨 놓을 것들이 있지만 일평생 길쌈만 해온 나는 아무것도 남겨 놓을 것이 없어야. 그래서 밥상보를 만들어서 너희에게 보냈다.”

어머니는 단순한 밥상보를 만들어 보낸 것이 아니었다. 인생살이의 오랜 기간을 재봉일로 살림을 꾸려 오셨던 어머니는 마음을 다잡고 당신이 이 세상에 남겨 놓을 어쩌면 마지막 기념품으로 솜씨를 부려 밥상보를 만드신 것이다. 두툼한 돋보기를 쓰고 바늘귀에 침을 묻히며 실을 꿰어 밤늦도록 한 땀 한 땀 천을 깁는 어머니의 모습이 떠올랐다.

“고맙습니다. 어머니는 백 살까지는 건강하실 거예요. 편히 쉬셔요.”

나는 한 가운데 있는 리본 모양을 한 고리를 잡아서 밥상보를 들어보았다. 네 귀가 잘 빠진 밥상보가 들려 올라왔다. 가위질, 색깔 배치, 바느질, 박음질, 고리 만들기를 하면서 어머니는 무슨 생각을 하셨을까. 지금껏 살아온 평생을 되돌아 보셨을 것이다. 그 순간 뭐랄까, 내게는 밥상보의 조각조각 천들이 어머니의 흘러간 시간들을 기워 만든 것처럼 보였다.

유년시절, 처녀시절, 결혼시절, 일평생 신고의 세월들을 짜맞추어 기워 놓은 밥상보. 천 조각 하나하나에는 남모를 아픔들이 스며 있을 것만 같다. 차마 이 선물을 허투루 쓸 수는 없을 것 같았다. 문득 액자에 담아 벽에 걸어두고 어머니의 일생을 담은 예술 작품으로 보아도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는 표구점에 가서 밥상보를 액자에 담아 거실 벽에다 걸어 놓고 마치 어머니가 옆에 계시듯 바라봐야지.

사람은 누구나 이 세상에 와 살면서 무엇인가 남겨 놓고 싶어 한다. 부든, 명예든 자기 나름대로 세상에 왔다간 기념으로 말이다. 어머니는 날더러 ‘글을 쓴다’ 하셨지만 솔직히 내 글은 어머니의 정성이 깃든 밥상보에 크게 못 미친다.

온갖 고생을 마다하고 세파를 온몸으로 밀고 오신 어머니가 만든 밥상보는 인생에서 승리한 사람의 장한 깃발처럼 보였다. ‘어머니 만세’ 하고 소리쳐 외치고 싶다. 긴 인생의 나날이 저물어가는 때에 무엇인가 남겨 놓고자 그 작은 맺음으로 이제 마음을 비우신 어머니는 훌륭한 인생을 사신 것이 아닐까. 절로 어머니께 머리가 숙여진다.

한 손주가 먼 나라에 갈 때도 대학 선생한테 한국의 밥상보라고 선물로 드리라며 만들어 주시더니…. 나는 밥상보에 얼굴을 묻고 옛날을 생각한다. 밥상보를 들어올리면 밥상에는 보리밥 한 그릇과 찬물 한 그릇, 풋고추와 된장, 그리고 열무김치가 있었다.

밥상에 파리가 날아들까봐 먼지가 앉을까봐 밥상보를 덮어 놓고 가족들이 오기를 기다리던 어머니의 밥상보. 내가 만일 귀한 것을 얻는다면 그것이 무엇이건 밥상보로 덮어두리라. 어머니의 밥상보에 덮여 있던 먼 옛날의 시골 여름이 그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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