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부패로 망하다 (33) - 최익현, 강화도 조약을 반대하다가 유배 가다.
조선, 부패로 망하다 (33) - 최익현, 강화도 조약을 반대하다가 유배 가다.
  • 김세곤 호남역사연구원장
  • 승인 2021.07.05 09: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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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76년 1월 20일에 고종은 일본과의 수교에 관하여 시임 대신(時任大臣)과 원임대신(原任大臣) 및 의정부 당상을 소견하였다.

근정전
근정전

고종 : 일본과 300년 동안이나 좋은 관계를 맺어왔는데, 지금 서계(書契)에 대한 문제를 가지고 여러 날 서로 버티고 있으니 정말 모를 일이다. 의정부에서 의논하여 적당한 대책을 세우는 것이 좋겠다.

영부사 이유원 : 신들이 날마다 의정부에 모여서 의논한 지 오래지만, 지금 일본인들의 행태를 보면 그냥 돌아갈 것 같지는 않습니다.

영돈녕부사 김병학 : 저 사람들은 말로는 좋은 관계를 맺으러 왔다고 하지만, 여러 가지 상황으로 보아 좋은 관계를 맺으려는 것이 아니라 불화를 일으키려는 것입니다.

판중추부사 홍순목 : 외환(外患)이 어느 시대인들 없었겠습니까만, 조정이 옳게 처리하고 백성들의 마음이 굳건하다면 일본 사람들이 저절로 돌아가게 될 것입니다.

판중추부사 박규수 : 일본이 좋은 관계를 맺자고 하면서도 병선(兵船)을 끌고 오니 그 속셈을 헤아리기 어렵습니다. 다만 생각건대 안으로는 나라를 잘 다스리고 밖으로는 외적의 침입을 막는 방도를 다하여 부국강병을 이루었다면 어찌 감히 함부로 서울 부근에 와서 엿보며 마음대로 위협할 수 있겠습니까? 참으로 분함을 금치 못하겠습니다.

(박규수는 고종이 궁궐 수비만 강화하고, 강화도의 변방 수비를 무너뜨린 것에 불만을 터트린 것이다.)

영의정 이최응 : 접견 대관이 보낸 장계를 보니 저 사람들의 속셈은 매우 헤아리기 어렵습니다. 날마다 의정부에 모여서 처리할 방도를 의논해야 하겠습니다.

우의정 김병국 : 저들의 정상이 과연 좋은 관계를 맺기 위해서 그러는 것이겠습니까? 내려간 대관이 여러 날 그들을 만나고 있으니 그의 보고를 기다려서 대책을 강구해야 할 것입니다.

근정전 내부
근정전 내부

이윽고 고종이 하교하였다.

"오늘 시임 대신과 원임 대신들을 입시(入侍)하게 한 것이 바로 이 일 때문이다. 여러 대신들은 충분히 의논하고 적당한 대책을 잘 세우도록 하라. 지금 강화도에서 온 장계를 보면, 저 사람들이 조약 13건이 있다고 하였는데 아직 보고가 오지 않았다. 아직 자세히 알 수는 없으나 첫째 관(館)을 개설하여 통상하자는 것은 이미 동래부 왜관에서 설치하고 시장을 열고 있는데 무엇을 또다시 설치하겠는가?"

(고종실록 1876년 1월 20일)

1월 21일에 접견 대관 신헌이 1월 19일에 일본 전권 대신 구로다와 3차 회담한 결과와 역관이 베껴온 조약 등본을 의정부에 올려 보냈다.

3차 회담에서 일본 측은 서계 문제와 조약 문제를 속히 조정에 품달(稟達)하여 정부의 처분을 받아 달라면서, 만약 화목하던 관계가 나빠지게 된다면 우리 군사들이 상륙할 수도 있을 것이니, 미리 헤아리라는 위협적 언사도 덧붙였다.

1월 22일에 고종은 모화관에 나아가 청나라 칙사(勅使)를 맞아들였다.

이날 고종은 근정전에서 칙사와 부칙사를 접견하였고, 23일에도 남소관(南小館)에 나가서 칙사를 또 만났다.

당시에 청나라 이홍장은 조선의 대일 문제에 방관적 입장이었다. 조선과 일본이 충돌할 경우 청나라가 도울 힘이 없다며 선을 그었다.

1월 23일에 흥선대원군을 실각시킨 일등공신 최익현이 일본과 통상 반대 상소를 올렸다.

“신은 감히 고려 때의 우탁과 선조 때의 조헌의 고사를 본받아 도끼를 가지고 대궐 앞에 엎드렸으니, 삼가 바라건대 빨리 큰 계책을 세우고, 조정 관리들 가운데서 한 사람이라도 화친을 주장하여 나라를 팔아먹고 짐승을 끌어들여 사람을 해치려고 꾀하는 자가 있으면 사형으로 처단하기 바랍니다. 만일 그렇지 않을 경우 이 도끼로 신에게 죽음을 내리신다면 조정의 큰 은혜로 여기겠습니다."

이러자 고종은 도끼 상소를 한 최익현을 체포하라고 하교하였다. 4일 후인 1월 27일에 최익현은 흑산도로 유배 되었다.

1월 24일에 의정부에서 아뢰었다.

‘몇 해 전부터 서계(書契) 문제로 서로 대립하여 왔으나, 지금은 계속 좋게 지내자는 처지에서 반드시 통상을 거절할 필요는 없습니다. 수호 조약(修好條約) 등 문제는 충분히 더 토론하여 양측에서 서로 편리하게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먼저 이런 내용으로 접견 대관에게 알리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이러자 고종은 윤허하였다. 고종은 일본과 수호 조약 체결을 결심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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