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부패로 망하다 (30) - 구멍 뚫린 국방
조선, 부패로 망하다 (30) - 구멍 뚫린 국방
  • 김세곤 호남역사연구원장
  • 승인 2021.06.14 09:21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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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75년 8월 29일에 차대(次對)를 행하였다. 운양호 사건이 일어난 지 4일 뒤였다.

운현궁 노안당
운현궁 노안당

좌의정 이최응이 아뢰었다. 이최응은 흥선대원군 이하응의 친형이다.

"일전의 영종진 사건은 너무 격분할 일이어서 말을 꺼내고 싶지도 않습니다. 설사 성이 고립되고 군사가 적다고 하더라도 추악한 무리들이 육지로 올라오는 것을 좌시한 채 600명이나 되는 포수와 군사들이 겁에 질려 쥐새끼처럼 도망쳐버렸습니다. (중략)

병인년(1866)에 양요(洋擾)를 겪은 뒤에 10년 동안 군오(軍伍)도 늘리고 성벽도 튼튼히 하고 무기도 수리하고 군량도 비축했으며 기예(技藝)를 단련하고 포상으로 격려하고 권장하는 등 조정에서 아주 치밀한 대책을 세웠는데, 지금 보니 너무나 한심합니다. 저들의 배가 방금 물러갔다고 하여 조금도 해이되거나 소홀히 해서는 안됩니다. "

우의정 김병국도 아뢰었다.

"이양선이 지금 물러갔지만 조금도 경계를 늦출 수 없습니다. 앞일을 걱정하고 미리 준비를 갖추는 일은 늦출 수 없으며 안으로 국정을 닦고 밖으로 침략을 막는 방법을 강구하는 것도 오늘의 급선무입니다."

이에 고종이 하교하였다.

"안으로 국정을 닦고 밖으로 침략을 막는 일은 참으로 오늘날의 급선무이다. 어찌 가슴에 새겨두지 않겠는가?"

(고종실록 1875년 8월 29일)

두 달 후인 10월 25일에 차대(次對)를 행하였다.

좌의정 이최응이 아뢰었다.

"지금 남쪽과 북쪽 변방에 우환의 조짐이 나타나고 있는데 사람들의 의논이 정해지지 않았고 중외의 창고 비축이 바닥이 나서 경비를 조달할 길이 없습니다. 물가(物價)는 점점 뛰어오르고, 도적은 많이 일어나며, 외읍(外邑)에서는 아주 사납고 매섭게 세금을 거두면서 경사(京司)에 상납하는 일에서는 시일을 끌고 있으며, 사치가 풍속을 이루고, 귀한 사람과 천한 사람의 구별이 없으며, 탐관오리가 징계되지 않아 재물을 긁어모으는 것을 일삼고 있으니, 이와 같아서야 나라가 어떻게 나라 구실을 할 수 있겠습니까? (고종실록 12권, 1875년 10월 25일)

그런데 10월 28일에 동래부에서 일본 선박의 선원들이 초량리에 불법적으로 들어와 민가에서 행패를 부렸다는 보고가 올라왔다. 변정(邊政)의 해이는 이미 도를 넘었다.

두 달 후인 12월 26일에 의정부에서 아뢰었다.

“이양선(異樣船)이 경기의 연해에 드나드는데 무슨 까닭인지 모르겠으니 사정을 자세히 묻지 않을 수 없습니다.”

1876년 1월 1일에 의정부가 또 아뢰었다.

"이양선이 경기 연해에 머무른 지 벌써 며칠째 됩니다. 그런데 그 배와의 거리가 수 300리(里)나 떨어져 있기 때문에 아직까지 맡은 직무를 수행하지 못하였다 합니다.”

4일 뒤인 1월 5일에 의정부에서 보고했다.

"일본 군함에 대하여 사정을 물어본 내용에 대한 보고를 연이어 받아 보니, ‘그들이 기어코 우리나라의 대관(大官)을 만나보겠다.’라고 하였습니다. 먼 지방에서 온 사람을 친절히 대우하는 뜻에서 그들의 소원대로 한 번 만나서 말해보는 것도 좋을 것 같습니다.

접견 대관(接見大官)으로 판부사 신헌, 부관은 부총관 윤자승을 임명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이러자 고종이 윤허하였다.

(고종실록 1876년 1월 5일)

1월 13일에 강화유수 조병식이 이양선에 관하여 장계를 올렸다.

"그들의 배에 우리 측의 의사를 통지하려고 훈도(訓導) 현석운과 역관(譯官) 오경석을 인천 땅으로 보냈더니, 그들의 회답 보고에 의하면, 그들의 배는 이미 연기를 뿜으면서 올라갔기 때문에 서로 만날 수 없었고, 정박하고 있는 항산도로 뒤쫓아 가서 모리야마 시게루를 만났습니다. 시게루가 말하기를, ‘일전에 인천의 지방관이 전하는 말을 들으니 귀국(貴國)의 대관(大官)이 강화에 와서 머무르고 있다고 하기에 내일 육지에 올라서 성에 들어와 유수(留守)를 만나보고 대관과 만날 의절(儀節)을 의정(議定)하겠다. 귀국의 군사나 백성들이 만약 난폭한 행동을 하면 우리도 상응하겠다’라고 하였다고 합니다.

우리 측에서 애초에 그들에게 먼저 손을 대지 않고 그들이 육지로 올라 오도록 내버려둔다면 신이 접견하는 것을 어느 겨를에 다시 논하겠습니까? 이와 같은 형편에 이르러 방어할 책임을 다하지 못하니 황송하기 그지없습니다." (고종실록 1876년 1월 13일 2번째 기사)

강화유수 조병식, 참으로 한심하다.

1866년 10월 16일 병인양요가 한참인 때에 흥선대원군은 강화도 진무영 사령관 진무사(무신)에게 강화유수를 겸직하도록 조치하였다. 이는 ‘양요(洋擾)’ 승전 전략이었다. 그런데 고종은 1874년 7월 28일에 무신인 진무사 신헌 대신 문신 조병식을 강화유수로 임명한 것이다. 고종 스스로 국방을 소홀히 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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