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른 여름
푸른 여름
  • 문틈 시인
  • 승인 2021.06.03 13:59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여름 나라로 가려면 몸도 마음도 푸른 옷으로 갈아입어야 한다. 여름이 온통 푸른 빛으로 온 대지를 칠해 놓았기 때문이다. 풀과 나무들이 푸르름으로 숨긴 신비한 세계는 여름과 한몸이 되지 않고서는 경험할 수 없다. 여름의 국경을 넘을 때 필요한 여권은 푸르름이다.

여름 나라가 뿜어대는 푸르름 속에서 나는 새로 시작하는 계절을 목격한다. 여름은 나뭇가지마다 푸른 잎새들 사이에 열매들을 매달아 놓는다. 여름을 주재하는 태양이 긴 팔을 뻗어 여름의 실과들을 어루만진다. 은행, 모과, 감, 살구, 복숭아 같은 실과들은 태양의 세례를 받고 조금씩 몸집을 부풀리지만 우리 눈에는 푸르름에 가려 잘 보이지 않는다.

숨막힐 듯한 푸르름을 폐부 깊이 들이마시며 나는 푸르름에게로 나아간다. 여름 나라 안으로 한 걸음 내디딜 때마다 푸르름에 녹아들면서 이윽고 나도 여름의 일부가 되어버린다.

먼 날의 여름, 그때가 그립다. 그때 나는 보리가 패여 있는 청보리밭으로 가곤 했다. 불꽃처럼 위로 솟은 보리 모가지가 일제히 바람에 흔들린다. 흡사 군무를 하듯 보리밭이 일제히 흔들리는 풍경은 내 시야를 압도한다. 어떤 아이들은 보리밭 고랑에 꿩알이 있다느니 했지만 한 번도 그것을 찾으려 들어가 본 적이 없다.

보리밭 속에는 무엇인가 모를 엄청난 것이 있는 것만 같았다. 다섯 마지기의 청보리밭을 무성하게 자라게 한 무시무시한 힘이 보리밭 속에 있는 것만 같았다. 나는 짙푸른 보리밭에 한번 들어가면 영영 나오지 못할 것 같은 무서운 무엇이 청보리밭에 있다고 정말로 믿었다.

보리 모가지들이 이글거리는 태양에 그을려 차츰 푸른색이 갈색으로 변해가고 있었다. 여름 나라에서 보리가 익어가고 있었다. 우리는 보리를 한 모가지씩 끊어서 보리밭 가에 돌무더기를 세워놓고 마른 나뭇가지들을 주워다 불을 피워 보리를 구웠다. 푸른 연기가 하늘에까지 올라갔다. 하늘에는 매가 동그라미를 그리며 돌았다.

불에 익힌 보리 모가지를 두 손바닥으로 비벼 통통하게 밴 보리알들을 입에 털어 넣었다. 우리는 그렇게 입안 가득히 여름을 맛보았다. 오직 여름 나라에서만 맛볼 수 있는 진미였다. 보리가슬을 하고 난 뒤 보리밭에는 보리밑둥만 이랑이랑 남아 있을 뿐 나를 전율케 한 무서운 무엇이 없는 것을 보고 울고 싶도록 마음이 허전했다.

‘보리밭 사잇길로 걸어가면/뉘 부르는 소리 있어 나를 멈춘다/…./돌아보면 아무도 보이지 않고/저녁놀 빈 하늘만 눈에 차누나’(박화목)

그러나 푸르름을 거두어간 빈 보리밭에는 엄청난 쓸쓸함이 공포처럼 바닥에 깔려 있었다. 우리는 망을 들고 풀을 베러 갔다. 들에서 낫으로 푸르름을 한 줌씩 벨 때마다 진한 풀내음이 온몸을 감쌌다. 마당가에 부려 놓은 풀은 썩어가면서 후텁지근하고 달짝지근한 퇴비 냄새를 온 집안에 풍겼다.

저녁에는 마당에 깔아놓은 덕석 위에 앉아 매캐한 모깃불을 피워 놓고 식구들이 둘러 앉아 저녁식사를 했다. 어머니가 미리 삶은 보리에 몇 줌의 쌀을 넣고 가마솥에 익힌 보리밥을 먹을 때, 농익은 된장에다 삼밭에서 따온 고추를 찍어 먹을 때, 하늘에 무리로 뜬 별들이 금방이라도 마당 위로 쏟아질 것만 같았다.

행복은 내 경험치에서 말한다면 분명코 여름날에 있다. 누가 푸른 여름날의 그 아름다움을, 행복감을, 다시 가져다 줄 수 있으랴. 무심한 세월은 우리에게서 보석을 훔쳐가듯 그 찬란한 날들을 데불고 가버렸다.

밥상을 물리고 덕석에 드러누워 하늘을 쳐다보고 있을 때 하늘에서는 별들끼리 소식을 전하느라 서로 긴 꼬리가 달린 유성을 던지곤 했다. 그 모습을 보고 나는 얼마나 신비감에 몸을 떨었는지 모른다. 어떤 별똥별은 다른 별에 가 닿지 못하고 뜨거운 채로 뒷산 너머로 떨어진 적도 있었다.

마당가 풀섶에서는 맑은 풀벌레 소리가 구슬처럼 반짝였다. 울타리 너머 논바닥에선 개구리가 시끌사끌 울어댔다. 사는 것이 그렇게 축복 같았다. 내가 이 세상에 와서 몇 번이나 푸르른 여름을 맞이했던가. 몇 번이나 온몸을 전율하며 행복감을 느꼈던가. 그 여름이 다시 왔다. 이 여름의 푸르름에 녹아들어 나는 그때처럼 완전히 여름과 한몸이 되어버리기를 소망한다.

푸르른 여름 나라로 가서 돌아오지 않는 행방불명자가 되기를 꿈꾼다. 푸르름과 하나가 되어버린 여름에 아무도 나를 알아보지 못하리라. 오, 여름이여, 푸르름의 신이여. 나와 함께 여기 여름나라에서 행복하소서.

최신 HOT 뉴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