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부패로 망하다 (21) - 흥선대원군의 10년 섭정이 끝나다.
조선, 부패로 망하다 (21) - 흥선대원군의 10년 섭정이 끝나다.
  • 김세곤 호남역사연구원장
  • 승인 2021.04.12 09:09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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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73년 11월 8일에 고종의 지시로 추국청이 설치되었다.

운현궁 노안당
운현궁 노안당

11월 9일에 추국청이 최익현에 대하여 형장(刑杖)을 가할 것을 청하는 의계(議啓)를 올렸다. 이에 고종은 추국을 중지하고 제주목에 위리안치하도록 전교했다. 하룻 만에 입장을 바꾼 것이다.

당황한 홍순목 등은 고종을 소견하였다. 하지만 고종은 완강했다. 홍순목 등은 성 밖에 가서 대죄(待罪)하겠다고 아뢰고 물러났다. (고종실록 1873년 11월 9일 5번째 기사)

이윽고 승정원에서 국문(鞫問)에 참여한 시임 대신과 원임 대신들이 모두 나갔는데 그 중에서 좌의정 강로와 우의정 한계원은 명소패(命召牌)를 바쳤다고 아뢰었다.

이에 고종은 "명소패를 도로 전해주고 즉시 집으로 돌아오라고 사관(史官)을 보내어 국청에 참여했던 시임 대신과 원임 대신들에게 전유(傳諭)하라."고 전교하였다. (고종실록 1873년 11월 9일 6번째 기사)

이 날 승정원에서 최익현을 엄벌에 처할 것을 청했다. 하지만 고종은 승정원에서 의논할 필요가 없다고 비답했다.

홍문관에서도 연명 차자(箚子)를 올려 앞서 내린 명을 거두고 국사(鞫事)를 완결짓게 해 주기를 청했으나, “너희들이 이렇게 시끄러우니 이게 무슨 도리인가? 다시는 쟁집하지 말라.”고 힐난했다.

사헌부와 사간원 양사에서도 최익현에 대한 가벼운 처분을 철회할 것을 청하였지만, 다시는 쟁집하지 말라고 비답했다.(고종실록 1873년 11월 9일 7-9번 째 기사)

11월 10일에 고종은 영돈녕부사 홍순목, 좌의정 강로, 우의정 한계원에게 경솔하게 행동한 경들의 처사가 안타깝다며 조정에 돌아올 것을 전유(傳諭)했다. (고종실록 10년 11월 10일 1-3번 째기사)

그리고나서 고종은 11월 11일에 홍순목, 강로, 한계원을 파면시켜 버렸다.

“전교하였다.

‘나는 국청(鞫廳)에 참여하였던 대신들의 일에 대하여 개탄스러움을 금할 수 없다. 최익현의 일에 대해서는 전후에 내린 하교에서 나의 뜻을 모두 이야기하였다. 그리고 자성의 하교가 내려졌는데도 큰 의리로 간주하여 이유 없이 도성을 나갔으니, 임금을 아끼는 마음이 있었다면 어찌 이렇게 행동할 수 있겠는가? 대신들이라고 하여 관대히 용서할 수 없다. 영돈녕부사 홍순목, 좌의정 강로, 우의정 한계원에게 모두 파직의 법전을 시행하라.’ ”(고종실록 1873년 11월 11일)

11월 12일에 고종은 최익현을 제주목(濟州牧)에 위리안치(圍籬安置)하였다. 1)

이로부터 한 달이 지난 12월 21일에 고종은 전교를 내렸다.

"오늘은 대원군의 생신이니 도승지로 하여금 문안을 올리고 오게 하라."

아버지의 생일 축하를 직접 가서 하는 것이 아니라 도승지를 보내 문안드리게 한 것이다. 이렇게 고종과 흥선대원군의 인연은 끊겼다. 권력은 부자간에도 나눌 수 없는 것이었다.

1874년 봄에 대원군은 운현궁을 떠나 경기도 양주 직곡의 별장으로 가버렸다. 흥선대원군 이하응(1820∽1898)의 10년간 섭정은 이렇게 끝났다.

구례에서 살았던 한말의 선비 황현(1855∽1910)은 『매천야록』에서 이렇게 적었다.

“대원군이 10년 동안 집권하면서 그 위세가 내외에 미쳤다. 「대원위 분부(大院位分付)」란 다섯 자가 삼천리 강토를 풍미하여 그 위세가 우레와 불같으므로, 모든 관리와 백성들이 무서워했으며 관청의 법을 언제나 두러워했다. 또 조석으로 유언비어가 판을 쳐 시골사람들이 서울에 오면 체포하여 죽인다고도 했다. 궁벽한 산중 촌민과 멀고 먼 해변의 어민들은 살고 싶은 마음을 잃게 되었다.

그러나 지금은 서로 기뻐하며 축하를 하고 있다.

어떤 사람은 이렇게 말했다.

‘대원군을 실각시키지 않았더라면 나라가 망해 오늘같은 날도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민씨(閔氏)들이 집권한 이후 백성들은 민씨 척족들의 착취를 견디다 못해 종종 한탄하며 도리어 대원군의 정치를 그리워했다.

이것은 후한(후漢) 백성들이 슬피 탄식하면서, 다시 망조(莽朝 : 왕망(王莽)이 전한(前漢)을 멸망시키고 세운 신(新)나라를 말함) 시절을 그리워한 것과 같은 것이다. 그것은 대원군이 백성을 사랑해서 그런 것은 아니었다.”

1)최익현은 제주도 유배 1년 3개월 뒤인 1875년 2월 9일에 석방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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