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봄날
어느 봄날
  • 시민의소리
  • 승인 2021.04.08 08: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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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 보는 꽃들은 어쩐지 더 아름다워 보인다. 산수유, 개나리, 진달래, 철쭉, 목련, 매화, 벚꽃…. 지금 내가 본 대로 이름들을 헤아리자면 한참 더 걸려야 한다. 뿐인가. 풀밭에 흩어져 있는 크고 작은 풀꽃들도 한창이다.

봄꽃은 흡사 어디서 부는 호루라기 소리를 듣고 일제히 피어난 것처럼 보인다. 마른나무 등걸을 찢고 연약한 꽃잎들이 피어난 모습은 기적이라고밖에 달리 말 못하겠다. 화려하기는 봄꽃들 가운데 벚꽃이 으뜸이다.

벚꽃은, 오후의 햇빛을 받아 눈부시게 빛을 발한다. 바람에 꽃잎들이 하늘거리며 휘날리는 모습은 나를 숨막히게 한다. 벚꽃 가지 사이로 언뜻 비치는 파란 하늘은 신의 얼굴 같다.

이 모든 것들은 도무지 내가 살던 이 세상 풍경이 아니다. 아마도 자연은 어딘가 이 세상 말고 다른 곳에 이런 선계(仙界)가 있음을 암시하고 있는 듯하다. 그렇지 않다면 어찌하여 잠깐 보여주고는 서둘러 사라져 버리는가.

눈이 부시게 피어 있는 벚꽃들을 보고 있노라니 잠시나마 세상 고락을 잊고 천국에라도 가 있는 느낌이다. 그럴 수만 있다면 벚꽃 그늘 아래 앉아 하루종일 아무 생각 없이 있고 싶다. 흔들리는 꽃그늘에 앉아 생에 지친 마음을 위로하고 꽃의 영광을 찬양하고 싶다.

봄은 왔다가 금방 가버리기에 나는 문득 그런 소망을 가져 본다. 혹독한 겨울을 통과해 온 내력을 가진 봄이라서 이토록 아름다운 것인가.

윌리엄 워즈워드는 ‘불멸의 송가’에서 ‘한때는 그리도 찬란한 빛이었건만/ 이제는 속절없이 사라진/ 다시는 돌아올 수 없는/ 초원의 빛이여, 꽃의 영광이여/ 우리는 슬퍼하지 않으리/ 오히려 강한 힘으로 살아남으리/ 존재의 영원함을/ 티 없는 가슴으로 믿으리’라고 노래한다.

속절없이 사라져버린 인생의 지난 날을 봄에 비유한다. 다시 돌아오지 않는 것이기에 봄날이 아름답다는 생각은 나 혼자만 하는 것은 아닌 것 같다. 짧은 봄날에 존재의 영원을 갈망하는 마음이 너무나 애틋하다.

나는 봄이 불어대는 호루라기 소리를 들은 것처럼 호수공원으로 간다. 벚꽃 잔치 날인가 할 정도로 길마다 숲마다 벚꽃이 만개하여 마치 꽃대궐에 들어선 느낌이다. 걷는 걸음은 주단을 깐 길을 걷는 양하고.

길바닥은 떨어진 벚꽃들이 점점이 수놓고 있다. 발걸음을 어디에 디뎌야 할지 모르겠다. ‘아래를 보면 떨어진 꽃, 위를 보면 떨어질 꽃’이라고 노래한 일본의 하이쿠 시가 떠오른다. 이 짧은 시는 아름다운 꽃들을 보고 만물의 생멸을 차갑게 짚는다.

그렇다면 다 떨어져 사라져 버리더라도 마음이 아릴 정도로 아름다운 꽃들을 어쩌란 말인가. 나는 작은 호숫가 긴 의자에 앉아서 바람에 잔물결이 출렁이는 것을 본다. 벚꽃은 호수에도 날아가 떨어져 벚꽃잎들이 호수 가장자리를 테를 두르듯 밀려와 있다. 흡사 호수가 꽃목도리를 두른 듯하다.

봄이 부는 호루라기 소리는 봄꽃들만이 듣는 것은 아니다. 내가 그랬듯이 사람들도 소리없는 호루라기 소리에 이끌려 나온 것이 분명하다. 나는 아무 말 없이 앉아서 호수의 물결 위로 나비떼처럼 분분이 날아와 떨어지는 벚꽃잎들을 본다. 물결이 꽃잎을 받아 호숫가로 밀려오는 것을 바라본다.

물결마다 금촉화살 같은 햇빛이 반짝인다. 지금 내가 보는 이 자지러질 듯이 화사한 꽃들이 자아내는 찬란한 풍경이 진짜 내가 사는 세상이란 말인가. 나는 이 자리에서 오래도록 떠나고 싶지 않다.

그러나 나는 그만 자리에서 일어서야 한다. 봄의 풍경으로부터 돌아와야 한다. 애틋하고 아쉬운 일이지만 나는 생활 속으로 돌아와서 다시 자질구레한 일상에 부대끼며 살아가야 한다. 이런 생각을 하자 갑자기 서럽다는 생각이 든다. 아무도 나를 영원히 여기 있으라 하지 않는다.

그것은 가능한 일이 아니기에, 봄의 풍경은 지나가버리고 말 것이기에 마치 착각처럼 우연히 봄을 본 듯하고 돌아오지 않으면 안된다. 나이가 들수록 봄은 아름답고 봄이 가는 것을 더 서러워하나 보다.

집에 돌아와 거울을 보니 내 머리에 벚꽃잎이 두어 개 묻어 있다. 내 어깨에도 한두 잎이 붙어 있다. 나는 꽃잎을 털어버릴 생각을 하지 못한 채 한참 동안 서서 거울을 바라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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