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정 스님
법정 스님
  • 시민의소리
  • 승인 2021.03.17 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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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법정 스님을 처음 만난 때는 대학을 졸업하고 얼마 되지 않아서였다. 나는 그때 정신적으로 방황을 하고 있었고, 산문에 들어가는 것을 진지하게 고민하고 있었다. 그런 생각 끝에 법정 스님을 뵈러 갔다. 법정 스님이 계신 서울 봉은사는 당시만 해도 한강 이남의 먼 곳이었다.

법정 스님은 내 생각을 간곡히 만류하면서 좋은 말씀들을 해주셨다. 내가 계속 고집을 피우자 그렇다면 한번 찾아가서 절밥이나 몇 달 얻어먹고 나오라며 추천서를 써주셨다. 남도의 큰 절에 계신 고명한 주지 스님에게 전하는 친서 같은 것이었다. 일이 뜻대로 되었으면 나는 속세를 떠나 가사를 입고 있을 것이었다.

내 심지가 굳지 못해서였겠지만 어떤 일로 행로가 달라지고 말았다. 그 후 간간히 법정 스님을 찾아 뵈러갔다. 사는 일이 힘들어 심적으로 의지가 없을 때 위로를 받을 양으로 간단없이 찾아갔다. 친구와 함께 가기도 하고 혼자서 가기도 했다.

어느 해 12월 31일 나는 강남에서 버스를 타고 어딘가로 가고 있었는데 안개가 매우 짙게 깔린 탓에 버스가 도로를 벗어나 길 옆 밭으로 들어가 버렸다. 버스기사는 안개 때문에 버스가 더는 갈 수 없으니 승객들더러 내려 알아서 가라고 했다. 내 일생 중에 그렇게 심한 안개는 처음이었다.

내가 갈만한 곳이라곤 가까운 곳에 봉은사밖에 없었다. 안개를 헤치고 걸어서 간신히 봉은사에 도착했다. 경내에 서 있는 소나무에 점점이 내리는 싸락눈 소리가 잊히지 않는다. 법정 스님이 기거하는 방에 들어가서 차를 마시고 한해도 마지막 밤을 그 선방에서 자게 되었다.

깨어나니 새해 첫날이었다. 눈이 하얗게 절 마당을 덮었다. 나는 절 마당에 내린 하얀 눈을 보면서 일생일대의 위로를 받았다. 무언지는 모르지만 뜨거운 것이 목에 차올라왔다. 기어이 살아야겠다는 그런 마음이었을 것이다.

불교 신도는 아니었지만 10대 시절 고향에 있는 정혜선원에서 1년간 지낸 일이 있어 절집하고는 낯설지 않았다. 나중에 알고 보니 법정 스님이 산문에 들어간 지 얼마 안되었을 때 정혜선원에서 잠시 머문 적이 있었다. 그것도 인연이라면 기이한 데가 있다.

법정 스님이 송광사 불일암에 머물 적에 1년에 한두 번 뵈러 갔다. 스님은 다른 곳으로 옮겨야겠다고 했다. 법정 스님을 존경하고 흠모하는 사람들이 많아서 찾아오는 사람들의 발길이 그치지 않았다. 용맹 정진할 수가 없다고 하셨다. 신혼부부들의 여행 코스가 되다시피 했다.

어느 해 추석 때였다. 그 무렵 직장의 데스크가 법정 스님의 출세간 이전의 행적을 기사로 쓰겠다며 프리랜서에 의뢰를 했다. 나는 화가 났다. 이미 출가해서 일가를 이룬 스님의 속세 시절을 기사로 써서 어쩌겠다는 것인가. 아무리 생각해도 이건 아니었다.

나는 그 길로 미리 불일암에 찾아가 스님께 사정 말씀을 드리고 미리 대비해 주시기를 바랐다. 다행히 기사는 유야무야로 끝났다. 스님은 나중에 강원도 오대산 작은 암자로 가서 혼자 지내셨다.

언젠가는 대학로 어느 식당에 갔는데 내가 맛있는 반찬을 두고 머뭇거리자 “앞발로 어서 먹어요.” 했다. 얼른 듣기에 매우 유머러스한 표현으로 들렸지만 이제와 생각하니 인간이나 동물이나 다를 바 없는 불성을 가진 생명체라는 뜻이 아니었을까싶다. 불가에서는 모든 생명이 윤회바퀴에 실려 오고가고 한다지 않은가.

법정 스님은 병을 얻어 세상을 버릴 때가 되자 서울에서 출가 본사인 송광사로 내려가셨다. 그때 스님을 부축해 간 스님들 중 한 사람이 법정 스님에게 물었다. “지금 기분이 어떠십니까?” 그러자 육신이 쇠약해져 몸도 가누기 어려운 법정 스님이 눈을 부릅뜨고 말했다. “어서 장작불에 들어가고 싶네.” 그리고는 곧 입적하셨다.

법정 스님은 참으로 깨끗하게 한 생을 살다 가신 분이다. 스님은 생전에 여러 권의 책을 써서 많은 사람들의 사랑을 받았는데 열반에 들기 전 출판사측에 스님이 쓴 모든 책을 절판하고 거두어 달라 하셨다. 이유인즉슨 세상에 와서 많은 말빚을 졌는데 그걸 다 깨끗이 하겠다는 뜻이었다. 참으로 속인으로서는 쉽게 이해하지 못할 세속 너머의 무상의 뜻이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스님이 직접 번역한 ‘진리의 말씀’이라는 책 앞장에 내 이름자와 함께 ‘1986년 2월 8일, 법정’이라고 사인을 해서 주신 책을 다시 펴보며 법정 스님을 그리워한다. 무소유를 설한 법정 스님은 산수유가 피는 이맘때인 2010년 3월 11일 입적하셨다. 세상의 모든 만남에는 필연코 헤어짐이 있나니, 사는 동안 원없이 사람을 그리워하면서 살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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