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부패로 망하다 (16) - 최익현, 만동묘 부활을 상소하다.
조선, 부패로 망하다 (16) - 최익현, 만동묘 부활을 상소하다.
  • 김세곤호남역사연구원장
  • 승인 2021.03.08 12:49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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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73년(고종 10년) 11월 3일에 신참 호조 참판 최익현이 다시 상소를 올렸다. 10월 25일의 상소이후 8일만이었다. 먼저 그는 호조 참판 사직부터 언급한다.

운현궁 이로당
운현궁 이로당

“신은 어리석고 무식한 시골 사람입니다. 설사 문을 지키는 일도 감당할 수 없거늘 하물며 호조(戶曹)의 관리라면 더 말할 것이 있겠습니까?”

그는 (1) 호조를 감당할 실력이 없음. (2) 승지를 사양하면서 참판 자리를 받는 것은 염치 없는 일임 (3) 자신은 물론 스승 이항로까지 욕되게 한 몸임 (4) 지난번 상소로 관리들을 수치스럽게 함 (5) 태평한 조정을 시끄럽게 함. 이런 5가지 이유로 사직하겠다고 상소한다.

이어서 최익현은 지난번 상소 가운데 못한 말을 구체적으로 상소한다.

“오늘의 의논을 보니, 정변구장이륜두상(政變舊章彝倫斁喪) 여덟 글자를 가지고 신을 규탄하는 칼자루로 삼고 있으니, 신은 다시 의견을 말하겠습니다.

지금 나라 일들을 보면 폐단이 없는 곳이 없습니다. 명분이 바르지 못하고 말이 불순하여 고치지 않으면 끝이 날 것입니다.

그중에서도 가장 두드러지고 심한 것을 보면 (1) 황묘(皇廟 만동묘)를 없애버리니 임금과 신하 사이의 윤리가 썩게 되었고, (2) 서원을 혁파하니 스승과 생도들 간의 의리가 끊어졌고, (3) 귀신의 후사(後嗣)로 나가니 부자간의 친함이 문란해졌고, (4) 나라의 역적이 죄명을 벗으니 충신의 도리가 구분 없이 혼란되고, (5) 호전(胡錢)을 사용하게 되자 중화(中華)와 오랑캐의 구별이 어지러워졌습니다.

신이 생각건대, 오늘날의 급선무는 만동묘(萬東廟)를 복구하는 것이며, 중앙과 지방의 서원을 짓는 것이고, 귀신의 후사로 나가는 것을 막지 않을 수 없으며, 죄명을 벗겨준 나라의 역적에 대해 추후하여 법조문을 적용하지 않을 수 없으며, 호전을 사용하는 것도 혁파하지 않을 수 없고, 토목공사의 원납전의 경우도 그냥 둘 수 없습니다.

이른바 황묘를 복구하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은, 우리 왕조는 명나라에 대하여 이미 300년 동안을 신하로서 섬겨왔고 임진년(1592년)에는 재조(再造)해 주었으니 만대를 두고 잊지 못할 은혜(재조지은)가 있으니 만대를 두고 반드시 보답해야 할 의리가 있습니다.

이로당 안내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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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대 임금은 관청 토지를 떼어주어 제물을 공급하게 하였고 친히 편액(扁額)을 써주어 빛내주는 뜻을 보였으며, 인정에 따라 원칙을 세움으로써 먼 후세에 가서도 의혹됨이 없게 하라는 명령까지 있었습니다. 또한 전교하기를, 우리나라의 풀 한 포기, 나무 한 그루에도 모두 황은의 혜택이 깃들어 있으니 집집마다 시동을 모셔놓고 제사를 지낸들 안 될 것은 없을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이 선대 임금의 거룩한 뜻이 어찌 그저 제단을 만들고 제사를 지내기만 하고 그것을 폐지할 수는 없다는 의리에서만 나온 것이겠습니까?

... 몇 해 전에 만동묘를 철폐할 때 여러 신하들과 백성들은 전하의 뜻이 오로지 공경하려는 데서 나온 것이라는 것을 모르지는 않았지만 오히려 서러워하며 슬피 울었던 것이며 온 나라 사람들의 심정은 약속하지 않았는데도 똑같았습니다. 그리고 세 유신(儒臣)은 상소를 올려 의리를 진달하였고 각 도의 유생들은 서로 꼬리를 물고 합문(閤門)에 나와 엎드려 상소하였습니다.

...삼가 바라건대, 밝으신 성상께서는 조용히 심사숙고하고 시원하게 생각을 바꾸어 빨리 제사를 회복하자는 요청을 허락함으로써 위로는 조종의 유지를 따라 준수하고 아래로는 나라 사람들의 심정에 부합되게 해 주소서.

... 오늘 황묘의 제사를 회복하는 것은 성덕에 더욱 빛을 드러낼 것이며 누(累)가 되지 않을 것입니다. 전하께서는 유념하여 맑게 살피소서.”

충북 괴산군 화양리에 있는 만동묘는 1689년에 사약을 받은 송시열의 유명(遺命)에 따라 그의 제자인 권상하가 1703년에 민정중등과 함께 유생들의 협력을 얻어 창건하였고, 명나라 신종과 의종의 신위를 모셨다.

그러나 이후 만동묘는 그 폐단이 서원보다 더욱 심하여 1865년(고종 2)에 대왕대비는 만동묘를 철폐했다.

이제 최익현은 만동묘 부활을 상소하고 있다. 이는 존명배청(尊明排淸)의 이념에 충실하고 송시열의 학통을 이어받은 노론의 입장만 대변한 것이었다.

한편 고종은 부친 흥선대원군을 몰아내고 친정하자 1874년에 만동묘를 부활시켰다. 노론과 손잡은 것이다. 여기엔 노론 집안인 민왕후의 입김이 작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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