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부패로 망하다 (10) - 중전 민씨, 대원군을 포위하다.
조선, 부패로 망하다 (10) - 중전 민씨, 대원군을 포위하다.
  • 김세곤 호남역사연구원장
  • 승인 2021.01.25 13:5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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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68년에 궁녀 이씨가 완화군(1868~1880)을 낳았다.

조선의 궁궐.
조선의 궁궐.

“17세의 고종(1852∽1919)은 매우 기뻐하며 원자(元子)로 책봉하려고 하자 대원군은 중궁(中宮)이 만일 경사가 있으면 어떻게 하려고 하냐면서 급히 서두르지 말라고 간하였다.”

위 글은 구례에서 살았던 조선의 마지막 선비 황현(1855∽1910)의 ‘매천야록’에 나온다.

그런데 「두산백과」에는 “완화군은 영보당(永保堂) 귀인 이씨 사이에서 태어났으며 고종의 첫 번째 아들이다. 고종의 총애를 받았으며 인 흥선대원군이 서자이지만 세자로 책봉하려 했으나 중전 민씨의 견제로 이루어지지 못하였다.”고 적혀있다.

필자는 황현의 입장을 지지한다. 1868년에 중전은 고종의 사랑도 못 받았고 대원군을 견제할 세력을 형성하지도 못했다.

이 기회에 중전 민씨(1851∽1895, 1897년에 명성황후로 추존)에 대해 자세히 알아보자. 그녀의 이름은 민자영, 1851년에 경기도 여주에서 태어났다. 여흥민씨는 태종의 왕비인 원경왕후와 숙종 계비인 인현왕후를 배출한 후 정승과 판서가 여러 사람 나온 노론 명문가였다. 아버지 민치록(1799∽1858)은 인현왕후의 부친 민유중의 5대손으로서 과천현감, 영천군수 등을 지냈는데 첫 부인 오씨는 일찍 죽고 재취로 이씨를 맞아 1남 3녀를 낳았으나 막내딸 자영만 살아남았다. 이 딸이 바로 조선을 쥐락펴락한 중전 민씨이다.

민자영은 부친이 8세 때 돌아가시어 홀어머니 밑에서 살았다. 문중의 관례에 따라 먼 친척인 민치구의 둘째 아들 민승호가 민치록의 양자로 들어갔다. 그런데 민승호가 바로 흥선대원군의 처남이었다. 대원군의 아내가 민치구의 딸이었던 것이다.

원래 흥선군은 고종이 어린 시절에 김병문의 딸과 결혼하기로 약속이 되어 있었다. 김병문은 안동김씨 일가이기는 하나 권력에서 소외되어 겉도는 처지였다. 그런데 고종이 왕위에 오르자 흥선대원군은 약속을 파기하여 버렸다. 안동김씨 김병문이 다시 외척정치를 할 수 있다는 점이 걱정된 것이다.

이러자 부대부인 민씨가 친척인 민자영을 추천했다. 대원군은 어머니도 여흥민씨로, 어머니 · 아내 · 며느리 3대에 걸쳐 민씨와 인연이 있었다.

대원군이 생각해 보니 고아나 다름없는 민자영은 외척정치를 막는데 안성맞춤이었고 믿는 도끼였다.

1866년 3월 21일에 고종은 흥선대원군의 저택인 운형궁에서 친영례(親迎禮)를 하였다. 고종이 15세 중전이 16세였다. 민자영은 시아버지 대원군 덕분에 일약 신데렐라가 된 것이다.

윤효정은 ‘풍운 한말비사’에서 “왕비의 총명한 천성과 부덕으로 나라의 운이 크게 흥할 것이라고 입을 모았다.”고 적었다.

그런데 1868년에 궁녀 이씨가 완화군을 낳자 민비는 한숨만 쉬고 있었다. 그녀는 잡념을 떨치기 위해 ‘좌씨춘추전’이나 ‘당송 팔대가 시문’등을 부지런히 읽었는데 이때 ‘책략’을 배웠다.

드디어 1871년에 중전이 회임을 했다. 혼례를 치른 지 5년 만이었다.

11월에 중전은 고대하던 원자를 낳았다. 그런데 원자는 낳은 지 5일 만에 죽고 말았다. 항문이 없는 아이였다. 대원군이 산삼을 달여 먹였는데 그것을 먹은 뒤 곧바로 죽어 민비는 시아버지가 죽였다고 의심했다.

(이이화 한국사 이야기 17권). 다른 책 (역사 저널 그날 8)에는 중전의 회임 시에 대원군이 산삼을 보내어 아이가 죽었다고 적혀 있다.

아무튼 중전 민씨는 1871년부터 대원군을 몰아내려는 준비를 했다. 노론 집안인 그녀는 우선 노론과 손을 잡았다. 1871년 3월 9일에 대원군은 서원을 철폐하여 전국적으로 47개소의 서원만 남기고 600여 개소를 없앴다. 유림들은 대원군을 ‘동방의 진시황’이라 비방했지만, 대원군은 오히려 「백성을 해치는 자라면 공자가 다시 살아나도 내가 이를 용서치 않을 것이라.」고 단언했다. 이러자 가장 피해를 입은 노론이 결집하기 시작했다.

아울러 중전은 대원군에게 소외당한 인척들을 포섭했다. 대원군의 처남 민승호와 사위 조경호, 셋째 형 이최응과 큰아들 이재면, 그리고 조대비의 조카인 조영하 등이었다. 원래 등잔 밑이 어두운 법이다.

1872년 4월에 청나라를 다녀온 사신 민치상이 청나라 황제 동치제가 친정을 시작했다고 보고했다. 이를 놓치지 않고 중전은 고종에게 친정을 부추겼다. 20세가 넘은 고종도 아버지 대원군의 그늘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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