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 온 날
눈 온 날
  • 문틈 시인
  • 승인 2021.01.14 14: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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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에 일어나 보니 창 밖이 온통 눈으로 희게 덮여 있다. 하얗게 덮인 풍경 위로 눈이 펑, 펑, 내리고 있다. 무슨 기적이라도 일어난 것 같다. 아, 나는 무언지 모를 기쁨 같은 것이 내 가슴에 가득 차오르는 것을 느낀다. 나는 막 설국에 도착한 기분이다.

눈은 마을에서 마을로 난 길을 하얗게 덮고, 송정시장으로 가는 길을 덮고, 나라와 나라 사이의 국경을 덮는다. 모든 세상은 설국으로 한 나라가 되었다. 남과 북의 경계도 보이지 않는다. 눈은 오랜 증오와 적대를 덮었다.

눈이 내린 날은 저 북방 멀리 개마고원쯤 되는 어느 시골 마을에 장거리 전화를 걸고 싶어진다. 따르릉~. “거기도 눈이 왔어요?” 그러면 북방의 말씨로 “여기도 눈이 많이 왔디요” 그렇게 대답하지 않을까. 눈이 내려서 한 나라가 된 세상은 아름답고 푸근하게 보인다.

그 나라에서는 이념이니 분단이니 부동산이니 하는 말들은 다 쓰잘 데 없는 말들이다. 그냥 진정한 설국의 시민이 되어 서로 얼싸안고 포옹하고 좋아서 눈싸움이나 할지 모르겠다. 아니 눈싸움 같은 것조차도 당최 하지 않을 것이다. 그냥 서로 설국의 시민이 된 것만으로 행복할 것이므로.

눈이 내려서 논과 밭, 마을과 마을, 나라와 나라 사이의 경계를 덮은 이 아침에 나는 옷을 두툼하게 껴입고 길을 나서려 한다. 북쪽으로 걷고 걸어서 설국의 북방 끝까지 가보고 싶다. 경계선 어디에서 누가 갑자기 총부리를 겨누고 나타나 “섯!’ 하고 소리치면 나는 두 손으로 하얀 눈을 뭉쳐 눈을 부릅뜬 그 병사의 손에 말없이 건네 줄 것이다. 이 눈뭉치가 북방으로 들어가는 패스포트라고.

눈은 숲을 덮고, 마을의 지붕들을 덮고 세상은 눈에 덮여 어디가 네 지역이고 어디가 내 지역인지 분간이 안된다. 사람들이 함부로 경계를 넘어 오가도 더 이상 막지 않는다. 왜냐하면 국경선이 없어진 설국이니까.

눈이 세상을 덮기 전 나는 어떻게 살아왔는지 생각하면 참 부끄러워진다. 부자니, 가난뱅이니, 잘 났니, 못났니, 장관이니, 죄수니, 이런 잡동사니들은 설국에서는 다시 말하지만 다 소용없는 것들이다. 눈이 다 덮어버려서 보이지조차 않는 것들, 사라져버린 것들이 대체 눈 온 날에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눈이 내려 지상에 설국이 강림한 날은 암만해도 나는 이 시 한편을 외워야 정한 마음이 된다. 폭설이 내린 우리나라 겨울에 딱 맞는 시다. 시인은 눈이 내리는 북방의 정서를 노래한다.

‘북국(北國)에는 날마다 밤마다 눈이 내리느니/회색 하늘 속으로 흰 눈이 퍼부을 때마다/눈 속에 파묻히는 하아얀 북조선이 보이느니//가끔 가다가 당나귀 울리는 눈보라가/막북강(漠北江) 건너로 굵은 모래를 쥐어다가/추위에 얼어 떠는 백의인(白衣人)의 귓불을 때리느니//춥길래 멀리서 오신 손님을/부득이 만류도 못하느니/봄이라고 개나리꽃 보러 온 손님을/눈 발귀에 실어 곱게 남국에 돌려보내느니(중략)//오호, 흰 눈이 내리느니, 보오얀 흰 눈이/북새(北塞)로 가는 이사꾼 짐짝 위에/말없이 함박눈이 잘도 내리느니’(김동환, 눈이 내리느니)

소리내어 암송하다 보면 시가 끝나는 지점에 북국의 끝이 보인다. 그 옛날 선조들이 말을 타고 달리던 해란강도 보인다.

눈이 온 날은 철조망에 막혀 한번도 가보지 못한 북국에 가고 싶다. 가슴에 가득 차오르는 북국에 대한 그리움을 나는 어쩌지 못한다. 여름 지나 가을 가고 겨울이 오면 세상은 모든 것들의 진면목이 나타난다. 숲에는 나무들이 벌거벗고 서있다. 사람들의 마음도 훤히 들여다 보인다. 아무것도 숨길 것이 없이 본디 생긴 그대로다.

눈이 내린 세상에서는 죄를 지을 수 없다. 그래서 눈이 하얗게 덮인 세상은 모든 것들이 ‘괜찮다, 괜찮다’(서정주)히고 말하는 것 같다. 이 나라에 눈이 오는 것은 북극이나 시베리아의 찬 한랭전선이 내려와서가 아니다. 갈라진 세상이 한 나라가 되어 살고 싶은 지극한 마음들이 하늘에 닿았다가 하얀 눈이 되어 내리는 것이다.

눈이 내린 날은 다만 바라볼 뿐이다. 축복과도 같이 펼쳐진 눈 덮인 세상에서는 누구도 말 한마디 할 필요가 없다. 고통으로 울음을 울 필요도 없다. 하늘이 잠시 천국의 모습을 지상에 보여준 것으로 그날의 약속을 한 까닭이다. 보오얀 흰눈이 내린다. 나는 지금 멀리 북방의 끝에 갔다 돌아온 느낌이다. 설국으로 한 나라가 된 세상을 상상으로나마 그려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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