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운 날 개천가에서
추운 날 개천가에서
  • 문틈 시인
  • 승인 2021.01.07 08: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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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 동안 폭설과 함께 날씨가 영하로 내려가 개울물이 꽁꽁 얼어붙었다. 빙판 위에 조무래기들이 색색깔의 옷을 입고 나와 썰매를 타거나 얼음지치기를 한다. 곳곳에 눈사람도 여러 모습으로 있다. 나는 우리 집 강아지 복동이에게 겨울옷을 입혀 데리고 나간다. 춥다고 집에서 웅크리고 있었더니 기력이 떨어지는 것 같다.

걸어야 산다는 말은 몸 관리에 딱 맞는 말이다. 산책은 마음에도 한결 생기를 불어넣는다. 전에 알던 한 성당 신부는 사람은 죽으면 발바닥을 보이지만 산 사람은 발등을 보인다고 말해주었다. 나는 칼바람을 맞으며 매섭도록 차가운 공기를 뚫고 걷는다. 시린 손을 주머니에 넣었다 뺐다 하며 걷는 기분이 싫지 않다.

겨울이 아니면 언제 이런 차가운 바람 속을 거닐어 볼 수 있겠는가. 뺨이며 귓불이며 찬바람이 스쳐가는 얼얼한 느낌이 겨울의 한 가운데 당도해 있는 기분이다. 흐르는 개울물을 단단히 얼리는 추위마저도 내가 살아 있음에 감사를 표하게 한다.

차가운 바람이 불고 그 속을 걸으면서 나는 절로 몸을 부르르 떨며 ‘나는 살아 있다’, ‘나는 살아 있다’하고 속으로 몇 번이고 외친다. 살아 있다는 것은 좋은 일이다. 그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는 절대적 존재감이다. 복동이는 그저 신이 난 모양이다. 마치 발에 바퀴를 단 듯 종종거리며 잘도 간다. 복동이도 필시 자기가 살아 있음을 격하게 느끼는 모양이다.

개천 양 쪽에는 둑이 있고 둑 아래로 둔치가 있는데 여름 한철 푸르름으로 덮었던 그 모든 땅이 잿빛으로 죽어 있다. 어느 한 곳에도 생명의 푸른빛이라곤 없다. 이 드넓은 땅에 여름 한철 무성한 풀들이 우거져 있었다니 믿어지지 않는다. 그 짙은 푸르름은 다 어디로 갔을까. 그것은 정녕 환상이었을까.

가끔 이런 생각이 든다. 살고 죽고 하는 것은 환상이 아닐까 하는. 어떻게 생각하건 지금 살아 있음이 나를 천국으로 인도한다. 내가 살아 있다는 것이 곧 천국의 시민으로 있는 것이다. 살아 있음이 구원이라는 말이다. 지금 땅 속에서 풀뿌리들은 한참 봄맞이 푸른 물감을 준비하느라 부산나게 길쌈하고 있을 것이다.

나는 천천히 걷는다. 어디 딱히 목적지가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서두를 일이 없다. 그저 소요하는 것이다. 찬 공기를 들이마시며 살아 있음을 음미하며 하릴없이 발등을 보며 걷는다. 복동이는 귀를 쫑긋 세우고 나와 보조를 맞추며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며 따라 걷는다.

얼어붙은 개울 바닥으로는 물이 흐르고 있다. 깨진 얼음바닥으로 흐르는 물이 살짝 보인다. 참말이지 겨울에 대고 할 말이 없다. 개울물의 표면은 꽝꽝 얼어 있는데 그 밑으로는 물이 졸졸 흐르다니. 그저 기온이 영하로 내려간 것만으로 이렇게 풍경이 달라지다니.

자연은 진리를 곳곳에 숨겨놓고 있는 것 같다. 풀뿌리, 얼음장 밑 개울물, 쨍하고 빛나는 짙푸른 하늘. 나는 자연이라고 하는 수만 권의 신비한 책 앞에서 압도당하는 느낌이다. 누가 그랬다. 자연은 하느님의 성서라고.

사실 인간이 신을 넘보려는 수작으로 과학으로 자연을 해부하지만 그것은 한낱 자연의 주석서에 지나지 않는다. 그것도 극히 미미한 부분에 그친다. 자연은 영원무궁토록 진리를 감추고 있다. 그 한 조각을 파보고는 마치 진리를 다 안 것처럼 사람들은 떠들어댄다.

아침에 달걀 반숙을 하느라고 껍질을 깼을 때 껍질 안쪽에 공기주머니가 있는 것을 보고 나는 한참이나 넋을 잃고 바라보았던 적이 있다. 자연은 설명할 수가 없는 불가해한 영역에 있다. 그 신비스런 달걀껍질 공기주머니 안에 우리가 모르는 것이 있다.

날씨가 추워서인지 개천 산책로에는 사람들이 눈에 뜨이지 않는다. 모처럼 나는 개천 풍경을 독차지하고 걷는다. 마치 어느 낯선 별에 떨어져 혼자 걷는 기분이다. 막 우주선을 타고 이 별에 도착한 사람처럼 내 눈에 보이는 모든 것들을 호기심으로 바라본다. 개울을 덮은 얼음장에게, 시들어 누런 잔디풀로 남아 있는 푸르름의 흔적들에게, 늘 날아오던 해오라기에게, 그리고 주인의 마음을 헤아리는 복동이에게 나는 감사를 느낀다.

내가 보고 느끼는 모든 것들에게 새해의 축복과 감사를 전한다. ‘바람이 분다. 살아야겠다.’고 노래한 시인 발레리의 마음을 알 것도 같다. 요즘 겨울다운 겨울을 제대로 느낀다. 더 추울 것이라 한다. 나의 존재감은 더욱 깊어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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