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봉 정도전의 '답전보'에서 배운다.
삼봉 정도전의 '답전보'에서 배운다.
  • 시민의소리
  • 승인 2020.12.09 17: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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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동호 전남도 건설도시국장
전동호 전남도 건설교통국장

아름다운 농부에게 답한다. 대답할 答, 밭 田, 남자 미칭(아름답게 부름) 父의 뜻으로 조선 건국의 기초를 닦은 삼봉(三峰) 정도전(1342~1398)의 글이다.

그는 당시 회진현 소재동 거평부곡(현재, 나주 다시 운봉리)의 낮고 기운 좁은 집에 유배와 있었다. 대륙은 원이 기울며 주원장의 명(1368~1644)이 일어나고, 고려는 여진족과 왜의 침략으로 흔들리고 있던 때다. 1375년 여름, 삼봉은 ‘친원반명’ 세력에 의해 개경권력에서 밀려난다. 34세였다.
제방일조결(堤坊一朝決) ‘하루아침에 둑이 터지니’오언절구 ‘감흥(感興)’에 고려의 국운을 남기며 떠나왔던 것이다.

삼봉은 한적한 날이 계속되었지만 답답하기만 했다. 어느 날 바람을 쐬러 나갔다가, 호미로 김을 매던 머리는 희고 등에 진흙이 묻은 노인을 만난다. ‘노인장 수고하십니다.’인사를 했다.

물끄러미 바라보던 긴 눈썹을 가진 노인의 턱이 끄덕이더니 입이 열리기 시작했다.
그대의 의복이 해지긴 했으나 옷자락이 길고 소매가 넓으며 행동이 의젓한 걸 보니 선비요, 수족에 굳은살이 없고 뺨이 복스러우며 배가 불룩한 걸 보니 벼슬아치가 아닌가?

나는 거칠고 촉촉한 더운 이 땅에서 도깨비, 물고기, 새우와 더불어 살지만 조정에서는 추방되지 않으면 오지 않는 곳인데 무슨 죄를 지었는가?

어찌 너의 입과 배를 채우고 처자만을 위해 좋은 마차와 집에서 ‘不顧不義(부고불의)’ 불의를 돌보지 않고, 욕심을 채우려다가 무거운 죄를 얻었는가?
아니면 권신을 가까이하며 수레먼지와 말발굽 사이에서 남은 술과 식은 고기 조각이나 얻어먹으려고 어깨를 움츠리며 아첨을 떨어 기쁨(벼슬)을 얻었다가, 형세가 바뀌며 이렇게 죄를 얻게 되었는가?

‘曰否(왈부), 그런 게 아닙니다.’
그러면 단정한 말과 얼굴로 겸손해 보이고 청렴한 체하며 헛된 이름을 훔치고, 어두운 밤엔 분주하게 돌아다니면서 애걸하고 가엾게 보여 바르지 못한 것과 결탁하여, 녹위(祿位)를 낚아서 관수(官守)에 있거나 언책(言責)을 맡거나 하여 녹만을 먹고 그 직책은 돌보지 않아, 국가의 안위와 생민(生民)의 안락과 근심 그리고 시정(時政)의 득실과 풍속의 미악(美惡) 등에는 뜻을 두지 않았으며, 자기 몸만 보호하는 계책으로 세월만 훔치다가, 충의지사가 직분을 지키고 바른길을 말하다가 화를 당하게 되자, 안으로 그 이름을 시기하고 밖으론 그 패한 것을 다행으로 여기며, 비방하고 비웃으며 스스로 계책을 얻은 듯하다가, 하늘에 뜻이 밝혀져 이런 지경에 이르게 된 것인가?

‘그것도 아닙니다.’ 그렇다면, 경상(卿相)이 되어서 이리처럼 괴팍한 성질을 부리고 남의 말은 긍휼(矜恤)히 여기지 않으며, 아첨하는 자에 기뻐하고 아부하는 자는 기꺼이 들이면서도, 곧은 선비가 말을 거스르면 성을 내고, 바른 선비가 도를 지키면 배격하며, 임금의 작록을 훔쳐 사사로이 만들고, 국가의 형전을 농단하다가, 악행이 여물어 이런 죄에 걸린 것인가?

삼봉은 그저 듣기만 했다.
누더기를 걸친 노인의 입에서 나오는 한 마디 한 마디가 옛 성현의 말씀과 같았기 때문이다.
‘이런 곳에 저런 현자가...’ 더 이상 말을 이어갈 수가 없었다.
사실 그곳 백성들은 어려울 땐 초근목피로 연명을 하면서도 머리가 비는 것은 수치로 여겼을 정도로, 책을 가까이하고 있었다.

삼봉은 위민의식과 민본사상을 키우며 무엇을 할 것인지 고민하기 시작했다. 세 해를 보내고 유배에서 풀려나자, 삼각산 아래에 삼봉재를 짓고 미래를 열러 갈 후학을 가르치다가, 1383년 함경도동북면도지휘사 이성계를 만나러 간다.
1388. 5월 위화도 회군으로 고려왕실을 장악하며, 1392. 6.25.(양력 8. 5.) 새로운 왕조를 여는 기반이 된다.

오늘날에도 노인의 말은 다르지 않다. 원하는 민원(民願)이 원망의 민원(民怨)이 되게 한 적은 없었는지? 노인의 혼이 잠들어있는 그곳을 찾아간다.
삼봉이 결과 향기를 나누었던 산천은 초겨울 나뭇가지 마냥 텅 비어가고 작은 소로가 이어진다.

도올 선생의 ‘신소재동기’가 먼저 들어오고 ‘소재동비’와 ‘나주정씨세장산’비가 서있다. 그 자락에 마루가 달린 두 칸 초사(草舍)가 자리한다. 먼지가 끼고 자물쇠기 잠긴 채, 누가 다녀간 흔적조차 지워졌다.
조선 5백년 사상이 여물었던 곳치고는 너무나 초라하다.
나라도 임금도 백성을 위해 존재할 때에만 가치가 있다고 했던 삼봉의 정신을 가르치고 배우는 장으로 이용할 순 없을까?

2005년 가을, 도올은 이곳을 찾았다.
삼봉의 ‘소재동기’를 확인하고 싶었던 것이다. 주민의 생활상과 지명에 해당되는 위치가 정확하게 비정(比定)되는 보기 드문 유적이라고 했다.
삼봉이 실천을 모르는 지식인의 박학이 얼마나 무서운 허위인가를 깨달았던 곳이다.
도올은 우리 민족의 끊임없는 혁명의 샘물이라고 했다.
이제 시ㆍ도민이 응답할 차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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