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부패로 망하다 (2) - 삼정(三政)의 문란(紊亂)
조선, 부패로 망하다 (2) - 삼정(三政)의 문란(紊亂)
  • 김세곤 호남역사연구원장
  • 승인 2020.11.23 09:27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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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에 들어와 삼정(三政)이 문란(紊亂)했다. 삼정이란 국가재정의 주류를 이루는 전정(田政)·군정(軍政)· 환정(還政)인데, 전정(田政)은 토지에 매기는 조세이고, 군정(軍政)은 군역(軍役)세, 환정(還政 : 환곡)은 춘궁기에 백성들에게 쌀을 꾸어주고 가을에 싼 이자를 붙여 되돌려 받는 빈민구휼 제도였다.

다산 정약용 선생상(경기도 남양주시 다산 생가)
다산 정약용 선생상(경기도 남양주시 다산 생가)

그런데 삼정이 문란하여 백성이 토탄에 빠졌다. 정약용은 강진에서 유배 중인 1818년 봄에 지은 『목민심서』‘호전 6조’와 ‘병전 6조’에서 삼정의 문란을 통렬하게 비판했다.

한편 중앙정부가 세금을 거두어들이는 방식은 총액제였다. 이는 농민층 분화에 따라 세금부담자가 줄어들자 중앙정부가 군현 단위로 일정한 액수의 세금을 미리 정해줌으로써 세금 수취에 안정을 도모하려는 의도에서 시행된 것이었다.

그러나 총액제는 수세 업무를 수령과 아전에게 전적으로 위임함으로써 향촌 사회에서의 무제한적이고 자의적인 수탈을 가능하게 하는 폐단을 낳았다.

아울러 조세부담은 평민층에 집중되는 모순을 지니고 있었다. 군역의 경우 양반은 면제되었으며, 환곡 또한 신분 권력 돈을 가진 자들이 교묘히 빠져나가 일반 농민들이 고스란히 부담하는 불평등 구조였다.

(한국근현대사학회, 한국근대사강의, 한울, 2007, p 27)

그러면 삼정의 문란을 자세히 살펴보자.

▷ 전정(田政)의 문란

전정(田政)은 공정하고 정확한 전지(田地)의 조사와 측량을 바탕으로 1년에 소출되는 양을 검사하여 균등한 전세를 부과하는 제도이다.

그러나 전지에 대한 조사가 20년에 한 번씩 이루어지도록 규정되었으나 이것이 지켜지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소출량에 대한 조사도 담당자인

수령과 토호들의 농간에 의해 공정한 세금부과가 어려웠다.

전정의 문란은 실제 세액의 몇 배를 징수하여 착복하는 도결(都結), 법으로 정한 조세 외에도 각종 부당한 명목의 잡세, 농사를 못 짓는 황무지에도 세금부과, 심지어는 실제 소유하지 않은 토지(空地)에 세금을 징수하는 백지징세(白地徵稅)까지 생겼다.

▷ 군정의 문란

16세 이상 60세 미만의 남자들은 군역을 부담했는데, 양반은 군역에서 면제되었다. 1750년 (영조 26)에 균역법이 실시된 후에 군역 부담이 무명 두 필에서 한 필로 줄었지만, 19세기 들어 총량은 오히려 두 배로 늘어났다.

정약용은 『목민심서』 ‘병전(兵典) 6조, 제1조 첨정(簽丁 병역의무자 선정)’에서 이렇게 적었다.

“병역의무자를 군안에 올려 그들에게 군포를 거두는 법은 폐단이 커져서 백성들의 뼈에 사무치는 병통이 되었으니, 이 법을 고치지 아니하면 백성은 모두 죽어 갈 것이다.”

1803년 가을에 지은 ‘애절양’ 시는 황구첨정과 백골징포의 폐단이었다. 또한 군정 문란은 도망간 사람의 군포를 친척에게 부과하는 족징(族徵) 이웃에 부과하는 인징(隣徵) 등의 형태로 나타났다.

▷ 환곡(還穀)의 문란

삼정 가운데 폐해가 가장 큰 건 환곡이었다. 춘궁기에 백성들에게 쌀을 꾸어주고 가을에 싼 이자를 붙여 되돌려 받는 빈민구휼 제도가 정착된 것은 1626년(인조 4년) 이후인데 19세기에 이르러 환곡은 사실상 합법적인 수탈 제도로 변질되었다. 특히 매관매직이 성행하면서 벼슬을 돈 주고 산 관리들은 원금은 물론이고 몇 배의 이익을 챙기고 더 좋은 벼슬을 사기 위해 환곡을 악용하여 수탈을 했다.

환곡은 빌려주는 원곡에 모래나 겨를 섞어 양을 줄이는 등 다양한 편법이 자행되었다. 이에 환곡 받기를 거부하는 백성에게도 강제로 배부하거나, 이자를 돈으로 내도록 하여 아전들이 부당한 이익을 취하기도 하였다.

정약용은 『목민심서』 ‘호전 6조 제3조 곡부(穀簿 환곡의 장부)’에서 백성을 구제할 목적으로 마련된 환곡이 오히려 백성을 곤궁에 빠뜨리고 있음을 지적했다.

“환곡은 사창(社倉)이 변한 것으로, 곡식을 내어 파는 것도 아니고 곡식을 사들이는 것도 아니면서 백성의 뼈에 사무치는 병폐만 안겨주니, 백성이 죽고 나라가 망하는 일이 바로 눈앞에 닥쳤다.”

“감사가 환곡을 이용하여 장사를 하니 수령이 법을 어기는 일은 말할 것도 없다. 수령이 농간을 부려서 남은 이익을 도둑질하니 아전들이 농간 부리는 것쯤은 거론할 것이 못 된다.”

“상류가 흐리니 하류가 맑기 어렵다. 아전들이 농간 부리는 방법은 갖출 대로 갖추어져서 귀신같은 간계를 살필 길이 없다.”

이런 수령과 아전의 수탈에 견디다 못한 백성들은 정든 고향을 떠나 유랑자나 도둑이 되었고, 농민항쟁으로 나타났다. 그리하여 1862년에 전국적인 임술농민봉기가 폭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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