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것 그대로의 욕망과 분노, 트럼프가 일깨우다
날것 그대로의 욕망과 분노, 트럼프가 일깨우다
  • 조용래(광주대 초빙교수, 전 국민일보 편집인)
  • 승인 2020.11.18 09: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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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용래(광주대 초빙교수/전 국민일보 편집인)
조용래(광주대 초빙교수/전 국민일보 편집인)

요즘 세계적인 웃음거리는 단연 미국이다. 46대 대통령 선거가 지난 3일 벌어졌는데 2주가 넘도록 패자의 승복 선언이 없다. 도전자인 조 바이든 민주당 후보는 7일에야 겨우 승리 선언을 했으나, 연임을 노렸던 도널드 트럼프 현 대통령은 그저 모르쇠다. 모든 매체들이 바이든의 승리를 공식화했지만 트럼프 지지자들은 곳곳에서 대선불복 시위를 이어간다.

대선불복의 진원이 현직 대통령이라는 게 믿기질 않는다. 미국의 민주주의가 조롱을 받는 지경이다. 2016년 혜성처럼 나타나 공화당 대통령 후보경선과 본선에서 승리해 하루아침에 최고의 정치인으로 등극했던 트럼프는 지금 우격다짐 중이다. 그는 자신의 등극만큼이나 기발한 퇴임을 원하는 걸까.

하지만 현 사태를 글로벌 코미디로만 보기에는 그 실체가 너무나 복잡하다. 특히 트럼프와 바이든의 지지세력이 지나치게 대립적이다. 예컨대 바이든은 금융경제 중심지인 동북부와 실리콘벨리 같은 첨단기술 중심지인 서부 해안지역을 석권했고, 트럼프는 쇠락한 중서부 공업지대(러스트벨트)와 중·남부의 농업지대에서 선전했다.

러스트벨트와 농업지대 주민들은 경제적으로 소외된 채 기존 체제에 분노해왔다. 트럼프는 그들의 아픔을 콕 짚어냈다. 우선 그들을 나락으로 내몬 것은 값싼 중국산 공산품·농산품이라며 대중 무역전쟁을 선포했다. 뿐만 아니라 기존의 자유무역체제, 동맹관계, 국제질서조차도 미국에는 책임과 부담만 떠안겼다며 폐기를 선포하고 ‘아메리카 퍼스트’를 외쳤다.

4년 전 무명 정치인 트럼프가 대통령에 당선된 배경이 바로 그것이었다. 트럼프의 대중 압박정책은, 이미 전문가들이 중국의 부상을 우려하는 상황이었던 만큼 지지자들의 저변을 확대하는데 크게 기여했다. 대중은 점잔만 빼고 넌지시 상대를 압박하기보다 날것 그대로의 욕망과 분노를 토해내는 트럼프에게 열광했다.

그런데 이번 선거에서는 왜 패했을까. 코로나19 확산에 대한 트럼프의 무모한 대응 여파가 컸다. 이른바 그의 반지성주의(Anti-Intellectualism) 경향이다. 그는 감염병조차 무시하는 오만을 보이다 스스로 코로나19에 감염될 정도였다. 그의 반지성주의적 태도는 유권자들에겐 큰 위협으로 다가왔을 것이다.

또한 그는 반자유주의(Anti-Liberalism)로 내달렸다. 경찰의 과잉진압으로 죽은 조지 플로이드 사건과 관련해 ‘흑인 생명은 소중하다’ ‘조지 플로이드에게 정의를’ 등을 외치며 항의하는 시위대에 강경진압으로 맞섰다. 심지어 그는 진실보다 반진실(Alternative Facts)을 앞세워 날것 그대로의 욕망을 주장했다. 반지성, 반자유, 반진실 등 이른바 3A가 그의 발목을 잡았다.

문제는 트럼프 지지자가 더 크게 늘었다는 점이다. 이번 선거는 투표율이 66.8%로 지난 세기 이후 최고치를 보일 만큼 치열했다. 2016년 6298만표로 당선한 트럼프는 이번엔 965만표나 더 많은 7263만표(14일 현재)를 얻고도 패했다. 3A에 열광하는 이들보다 반(反)3A 그룹이 조금 더 많았기 때문이다.

바이든은 지난 7일 승리연설에서 “미국이 다시 세계의 존경을 받을 수 있도록 만들며 우리 국민들이 다시 하나로 뭉칠 수 있도록 하겠다”고 말했다. 하지만 날것 그대로의 욕망과 분노 표출방식에 익숙해진 유권자들의 마음을 다독이기란 쉽지 않을 터다. 분열의 정도가 심각해진 마당에 그 후유증을 단기간에 극복하고 통합하기엔 적잖은 어려움이 예상된다.

치유와 통합을 강조하면 할수록 바이든은 트럼프가 추진해온 대중 압박노선 내지 미국의 이익추구 노력과 결이 다른 정책을 펴기가 쉽지 않다. 대화와 타협을 중시해온 그의 오랜 정치이력으로 볼 때 트럼프의 3A는 배제하겠지만 정책목표는 크게 달라지지 않을 듯하다. 겉으로는 온건하되 내용적으로는 더욱 강한 압박정책이 나올 수 있다.

문제를 미국의 한반도 정책으로 한정해 보자. 트럼프가 주한미군 철수 운운하며 방위비 분담금 5배 인상을 강요하는 식의 억지는 부리지 않겠지만 분담금 인상문제는 날것 그대로의 욕망으로 이미 노출된 마당이니 폐기할 수 없을 것이다. 여기에 동맹인 한국에 대해 대중 압박대열에 줄 세우기를 강권할 수도 있다.

일각에서는 트럼프의 톱다운식 행보가 북·미 대화를 이끌었기에 그의 낙선은 한반도평화프로세스에 긍정적이지 않다는 견해도 있다. 하지만 지난해 2월 북·미 하노이회담이 실패로 끝난 것은 트럼프가 톱다운식으로 북핵문제를 해결하는 데 한계가 있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결국 남은 것은 실무자간 합의를 거쳐 단계적으로 진행되는 수밖에 없다.

우리에게 중요한 건 트럼프냐 바이든이냐가 아니다. 한국이 처한 입장과 추구하는 방향과 관련해 누구도 부인하기 어려운 설득력 있는 논리개발이 우선이다. 주변국을 설득, 소통할 수 있는 정도의 관계개선도 필요하다. 눈치를 보기보다 할 수 있는 일과 할 수 없는 일, 협력 여부를 분명하게 선언하고 가이드라인을 마련해 나아가는 것이 중요하다.

‘날것 그대로의 욕망과 분노가 꿈틀거리는 세계’에서 우리를 지키자면 더욱 지혜롭게 그 흐름에 대처할 수 있어야 한다. 트럼프를 변호할 생각은 추호도 없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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