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부패로 망하다 (1) - 세도정치 60년
조선, 부패로 망하다 (1) - 세도정치 60년
  • 김세곤 호남역사연구원장
  • 승인 2020.11.16 11:2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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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00년 6월 29일에 개혁 군주 정조가 갑자기 붕어했다. 11세의 순조(1790-1834, 재위 1800-1834)가 즉위하자 대왕대비 정순왕후(1745∽1805,영조의 계비)가 수렴청정하였고, 정순왕후는 노론 벽파의 정적인 노론 시파를 축출한 후에 천주교 탄압에 나섰다. 신유박해는 남인의 축출이었다. 남인인 정약용도 이에 연루되어 전라도 강진으로 18년간 유배되었다.

창덕궁 인정전.
창덕궁 인정전.

1800년부터 1863년까지 순조 · 헌종 · 철종 시대 63년간 세도(勢道)정치가 행해졌다. 임금은 허수아비였고, 안동김씨, 풍양조씨 일개 가문이 권력을 독점하고 전횡을 일삼았다. 견제가 전혀 없는 상태에서 권력 독점은 당쟁의 폐단보다 더 심하여, 중앙의 요직 차지와 과거제도 무력화, 매관매직으로 이어졌고 부정부패가 만연하였다. 수령과 아전들은 백성들을 수탈하여 삼정(三政 전정 · 군정 · 환곡) 문란이 극에 달했다. 『매천야록』를 쓴 황현(1855∽1910)은 ‘수령과 아전은 강도와 다름없었다.’고 개탄했다.

그러면 세도정치의 전개를 살펴보자. 1805년에 정순왕후가 별세하자 노론 벽파가 몰락하고, 순조의 장인 김조순(1765∽1832)이 이끄는 안동 김씨가 오로지 가문의 이익을 위해 조정의 요직을 차지한 뒤 국정을 농단하고 전횡을 일삼았다. 김조순은 병자호란 때 청나라로 잡혀간 척화파 김상헌(1570∼1652)과 숙종 때 노론의 영수인 김창집(1648-1722)의 후손인데, 안동김씨들은 비변사를 장악하고 세도정치의 씨를 뿌렸다.

그런데 순조의 아들 효명세자(孝明世子 1809∽1830)가 1827년(순조 27년) 2월부터 1830년(순조 30년) 5월까지 약 3년 3개월 동안 대리청정을 하면서 안동김씨를 견제했다. 그는 탐관오리의 처벌, 과거제도의 정비 등 다양한 개혁정책을 추진하였으나 21세에 갑자기 사망했다.

이에 김조순은 효명세자가 모은 정치세력을 축출하고 권력을 다시 강화했고 김조순이 죽은 뒤에는 아들인 김유근이 권력을 계승하여 1834년에 순조가 사망할 때까지 흔들림이 없었다.

순조는 죽기 전에 효명세자의 장인인 풍양조씨 조만영 가문에 속한 조인영에게 손자 헌종(憲宗,1827∼1849, 재위 1834-1849)을 돌볼 것을 부탁했다. 그리하여 헌종이 8세의 어린 나이에 즉위하여 순조비 순원왕후(純元王后 1789∽1857 김조순의 딸)가 수렴청정한 1840년까지는 순원왕후의 친정인 김조순 가문과 헌종의 외가인 조만영 가문이 연합하여 정국을 주도했다.

그 뒤 1849년까지 헌종이 친정할 때는 풍양조씨가 헌종의 지원을 기반으로 권력 행사에서 유리한 입장에 있었다. 하지만 풍양조씨도 가문의 이익만 꾀할 뿐 민생에는 뒷전이었다.

1849년에 헌종이 후사 없이 22세로 붕어했다. 이러자 대왕대비 순원왕후 김씨는 강화도에서 농부로 살고 있던 왕족 원범(元範)을 국왕으로 선택했고, 김조순의 일문인 김문근의 딸은 철종(哲宗, 1831∼1863)비가 되었다. 게다가 순원왕후 김씨의 동생 김좌근(1797∽1869)이 세 번이나 영의정을 하여 굳건한 안동김씨 세상이 되었다. 이리하여 서울 장동(壯洞 종로구 자하동)에 사는 김조순의 가문은 안동김씨와 구분하여 장동김씨라 불렀고, 김좌근이 살던 교동과 김문근이 살던 전동에는 벼슬을 얻으려고 뇌물을 바치는 무리들이 줄을 이었다.

심지어 영의정 김좌근이 애첩 양씨를 몹시 총애하자 벼슬자리를 원하는 사람들이 앞다투어 그녀를 찾아가 뇌물을 바쳤다. 그녀는 본디 전라도 나주 기생이었는데 매우 영악(靈惡)하여 김좌근을 홀렸다. 사람들은 그녀의 세도가 정승 못지않다 하여 영의정 김좌근을 영합(領閤)이라 부른 것처럼 그녀를 나합(羅閤)이라 불렀다.

어느 날 김좌근이 애첩에게 ‘세상 사람들이 그대를 나합이라고 부른다하니 무슨 이유냐’고 물었다. 그녀는 재치있게 대답했다.

“세상 사람들이 여자를 희롱하여 합(蛤 조개)라 부릅니다. 나합의 합은 조개 합이고, 합하(閤下)의 합(閤)이 아닙니다.”

영의정의 첩이 비선(秘線) 실세로 이토록 권세를 휘둘렸으니 매관매직의 폐해는 미루어 짐작할 만하다. 이렇게 뇌물로 벼슬을 산 수령들은 임기 안에 본전을 뽑으려고 악착같이 백성을 수탈하였다. 아전들도 수령과 결탁하여 재물을 챙겼으니 백성들은 도탄에 빠졌다. 참다못한 백성들은 1862년에 전국적으로 임술 농민항쟁을 일으켰다. 2월 4일에 경상도 단성에서 시작한 농민항쟁은 진주민란을 기점으로 삽시간에 퍼져 3개월 사이에 경상도 19개, 전라도 38개, 충청도 11개 지역에서 폭발했고 함경도 ·제주도에서도 폭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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