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머니칼의 추억
주머니칼의 추억
  • 문틈시인
  • 승인 2020.11.12 15:22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그때는 소나무 속껍질을 베껴서 먹고 쌀겨를 볶아먹던 시절이었다. 지독한 보릿고개를 넘느라 궁핍이 일상이었다.

연필깎이 칼을 살 돈이 없어 손수 만들어 사용했다. 나같이 별 재주 없는 소년도 연필깎이 칼을 만드는 법에 익숙했을 정도로 자기 앞은 스스로 가릴 줄 알아야 했다.

연필깎이 칼 제조법이 오롯이 기억난다. 집에 칼 만드는 시설이 있는 것도 아니지만 그 방법은 기상천외하고 의외로 간단했다.

먼저 길고 굵은 대못을 몇 개 가지고 동네 동무들과 함께 먼 학다리들을 건너 기차역까지 간다. 기차역에서 조금 떨어진 철길에 당도하여 아이들이 모두 철로에 귀를 대고 있으면 목포에서 출발한 기차가 언덕 모퉁이를 막 돌아오는 소리가 팔뚝의 맥박처럼 들린다.

“기차가 오고 있다!” 귀 밝은 동무가 먼저 소리친다. 한 마장쯤 떨어진 곳에 기차 달려오는 소리가 선로를 따라 귀에 들려온다.

그 소리는 뭐랄까, 멀리서 들려오는 무슨 생명체의 맥박처럼 들린다. 신호의 강약으로 대강 얼마나 가까이 오는지도 어림짐작할 수 있다.

우리는 각자 얼른 대못들을 꺼내어 철로 위에 올려놓고 침을 뱉아 못을 고여 놓는다. 그리고는 철길 둔덕으로 내려가 양쪽 귀를 막고 엎드려 있다. 기차가 굉음을 내지르면서 바로 우리 머리 윗쪽으로 쇠바퀴를 굴리면서 힘차게 역쪽으로 달려간다.

기차가 역으로 들어가면 우리는 얼른 대못을 놓아둔 철로로 올라간다. 대못은 두꺼운 종이모양으로 납작하게 눌려 펴져 있다. 대못을 손에 쥐면 약간 뜨겁다. 그러나 아직 펴진 두께가 더 얇게 펴져야 좋겠다 싶으면 다음 기차를 기다려 다시 같은 일을 반복한다.

두번 째 기차 쇠바퀴가 지나고 나면 더욱 납작하게 펴진 대못들을 들고 마치 무엇을 노획한 것처럼 의기양양하게 다시 학다리들을 건너 집으로 돌아온다. 이것은 칼 만들기의 준비 단계다.

넓게 펴진 쇠못을 나뭇가지를 잘라 가운데 틈을 내어 넓게 펴진 한쪽을 끼워 단단히 묶어서 싯돌에 간다. 하루종일 간다. 그러노라면 한쪽 부분이 점점 날카로워지고 나중에는 싯돌에 벼려서 칼끝이 날카롭게 번쩍인다. 가끔 칼끝이 예리해졌는지 한쪽 눈을 가늘게 뜨고 가늠을 한다. 얼마나 날까로운지 종이에 슬쩍 대고 긋기만 해도 종이가 반듯히 갈라진다.

이 못생긴 주머니칼로 시누대를 쪼개고 다듬어서 연을 만들기도 하고, 나무를 다듬어 꼬챙이도 만들고 참외를 깎아먹기도 하고 ‘맥가이버 칼’처럼 다양한 용도로 사용한다. 어떤 아이들은 이 주머니칼로 저만치 떨어져 있는 판자벽 과녁에 던져 꽂는 재주를 선보이기도 한다. 칼이 과녁에 꽂혀 바르르 떤다. 아이들끼리 게임이 벌어진다. 과녁에 동그라미를 겹쳐 그려놓고 점수 따기를 해서 챔피언을 결정하는 것이다. 문구점에서 파는 칼집이 달려 있는 칼처럼 번듯하지는 않아도 쓰기에 하나도 모자람이 없다.

주머니칼은 특히 연 만드는 데 제격이었다. 시누대를 쩍 갈라가지고 다듬어 거름푸대 종이나 한지에 풀을 먹여 붙여서 멋진 참연을 만드는데도 주머니칼이 없으면 안된다. 그 작고 볼품없는 주머니칼로 겨울에 연을 만들던 시절의 추억이라니! 필통에 주머니 칼을 넣고 다니거나 주머니에 지니고 다니면서 다용도로 썼다. 주머니에 넣을 때는 물론 칼날 부분에 두꺼운 종이로 칼집을 만들어 씌웠다. 주머니칼은 어린 소년에게 거의 만능 칼이 된 셈이다. 뭐니 해도 주머니칼로 연필을 깎는 것이 제일 흔한 일이다. 아, 연필을 보기 좋게 깎아내느라 사각사각 공들여 솜씨를 부려 깎아낼 때 까만 연필심이 드러나면서 깎여진 연필의 목질 부분에서 스멀스멀 뿜어져 나오는 그 연필 향기는 꽃향기보다 좋았다. 콧등에 연필을 부비며 연필향을 맡을 때 코로 스며드는 상긋한 내음은 마치 어린 소년의 머리를 깨우는 듯했다.

주머니칼만 있으면 더 이상 다른 휴대품이 필요하지 않았다. 재주 있는 동무들은 주머니칼로 나뭇가지를 잘라 윷도 만들고 심지어는 팽이를 만드는 동무도 있었다. 아득한 그 옛날에 인간은 돌칼을 만들어 썼다는데 그 돌칼 대신 주머니칼을 만들기까지 수천 년, 수만 년이 걸렸다니. 그 일을 내가 했다니... 나는 지금 주머니칼 하나만 있으면 좋았던 시절에서 집구석에 자자분한 전자제품을 늘어놓고 사는 시절로 너무 멀리 와버렸다.

최신 HOT 뉴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