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시 향 머금은 번안시조(198) 독좌(獨坐)
한시 향 머금은 번안시조(198) 독좌(獨坐)
  • 장희구 시조시인/문학평론가
  • 승인 2020.11.09 09: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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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일토록 문을 걸어 잠그고 둘 수밖에 없는 걸

공휴일이나 주말이 되면 밖의 사람들 연락도 두절되고, 깊은 사색에 잠길 때가 많다. 친지의 발길이 끊어진지도 오랜 침목이 흘렀다. 대학자의 휴일도 그랬던 모양이다. 국사에 전념하다 보면 그런 시간이 없을 것으로 짐작이 되는데, 혼자 앉아서 무작정 침묵의 시간이 흐르고 있었다. 만사를 잊고 싶고 깊은 사색에 잠기는 시간이었겠다. 거문고 눅눅해 소리는 아직 울려 퍼지고, 화로는 싸늘해도 불씨는 아직 남아 있다고 읊었던 시 한 수를 번안해 본다.

獨坐(독좌) / 사가정 서거정

거문고 눅눅해도 아직도 소리 울려

냉화로 싸늘해도 불씨는 아직 있어

진흙길 출입 방해에 문을 걸어 둘 수밖에.

琴潤絃猶響   爐寒火尙存

금윤현유향   로한화상존

泥途妨出入   終日可關門

니도방출입   종일가관문

종일토록 문 걸어 잠그고 둘 수밖에 없는걸(獨坐)로 제목을 붙여본 율(律)의 후구인 오언율시다. 작가는 사가정(四佳亭) 서거정(徐居正:1420~1488)이다. 위 한시 원문을 의역하면 [거문고 눅눅해 소리는 아직 울려 퍼지고 / 화로는 싸늘해도 불씨는 아직 남아 있네 // 진흙 길이 아무리 출입을 방해한다 해도 / 종일토록 문을 걸어 잠그고서 둘 수밖에 없는걸]라는 시심이다.

위 시제는 [홀로 앉아서]로 번역된다. 독실한 사색을 하기 위해 독좌하는 경우가 많지만, 우연히 혼자 남는 경우가 많다. 지난 날도 되돌아보고 다가올 미래를 설계하는 경우들이다. 시인은 자기 주위의 환경부터 잘 도닥거리면서 시주머니를 털어놓았다. 거문고가 눅눅해도 소리는 아직 울리고 있고, 화로는 싸늘하게 식어도 불씨는 아직 잔잔하게 남아 있다는 시심이다. 시인이 만들어놓은 잔영일 수도 있지만, 혼자 앉아 있는 시인을 위한 잔영일 수 있다. 미쳐 꺼지지 않는 이런 것이 오히려 시인의 마음을 차분하게 가라앉힐 수가 있다. 화자는 비가 내려 질펀해진 길을 걸을 생각을 하면서 시상의 문을 닫는다. 진흙 길이 출입을 방해할 수 있겠으니 종일토록 문을 걸어 둘 수밖에 없다는 결단적인 독좌獨坐로 들어가는 한 과정의 순서를 밟게 된다. 빈 뜰에 비가 뚝뚝 떨어지는 소리를 듣는 순간이겠다. 이어지는 후구에서는 [찾는 손님 없어 홀로 앉아 있자니 / 빈 뜰엔 빗 기운이 어둑어둑 해지네 // 물고기가 흔드니 연잎은 움직이고 / 까치가 살며시 내려앉으니 가지 끝이 너풀거리네]라는 시상을 일으키고 있다.

위 감상적 평설에서 보였던 시상은, ‘거문고 소리 울려 퍼져 불씨 아직 남았네, 진흙길이 방해해도 문을 걸어 둘 수밖에’라는 시인의 상상력을 통해서 요약문을 유추한다.

장희구 시조시인/문학평론가
장희구 시조시인/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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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는 사가정(四佳亭) 서거정(徐居正:1420~1488)으로 조선 전기의 문신이자 학자이다. 학문이 매우 넓어서 천문, 지리, 의약, 복서, 성명, 풍수에까지 관통하였으며 문장에 일가를 이루었고 특히 시에 능하였다. 1438년(세종 20) 생원과 진사 양시에 합격하여 크게 쓰였던 인물이다.

【한자와 어구】

琴潤: 거문고 눅눅하다. 고문고가 젖어있다. 絃猶響: 현은 오히려 울리다. 爐寒: 화로는 싸늘해도. 火尙存: 불은 오히려 있네. // 泥途: 진흙길. 진흙으로 뒤범벅이 된 길. 妨出入: 출입을 방해하다. 終日: 하루 종일. 可關門: 문을 걸어 둘 수밖에. 문을 걸어 둘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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