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잎의 노래
갈잎의 노래
  • 문틈 시인
  • 승인 2020.11.05 12: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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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만치 가을이 간다. 가을물이 든 나뭇잎새들이 지고 있다. 산은 온통 가을물이 들어 색색으로 눈부시다. 노랗고 빨갛고, 갈색으로 막 페인트칠을 한 듯하다. 봄, 여름, 가으내 길쌈을 하면서 비바람 태풍을 견디고 맺은 가을의 결실에 박수를 쳐주고 싶다.

길섶의 아주 작은 풀씨조차도 빛나는 승리의 영광을 받을 만하다. ‘경작금지’라고 쓰여진 팻말 옆 천변의 공지에 몰래 깨를 심은 아주머니는 수건을 머리에 쓰고 길가에 앉아 깨를 털고 있다. 상수리나무, 밤나무, 단풍나무 낙엽들이 함부로 바람에 흩날린다.

한때 푸르름으로 무성했던 잎새들이 분분히 떨어지는 풍경이 아름답기도 하고 쓸쓸하기도 하다. 봄에는 꽃이 지는 것을 보고 슬퍼했는데 가을에는 잎이 떨어지는 것을 보고 쓸쓸해 한다.

나는 숲길 사이로 난 조롱길을 걸으면서 가을물에 전신이 흠뻑 젖어든다. 바닥에 수북이 내려 쌓인 낙엽들이 발걸음을 디딜 때마다 부스슥 소리를 낸다. 낙엽 밟는 소리가 죽은 시인의 절명시를 읽는 듯하다. 낙엽들은 바람에 이리저리 굴러다닌다. 낙엽 구르는 소리가 가슴을 싸하게 한다.

낙엽이 무리지어 바람에 굴러다니는 소리는 가을이 세상 끝으로 가는 소리처럼 들린다. 가을이 남기고 가는 것에는 무엇인가 진정코 소중한 것이 있는 듯하다. 내가 잊고 살아온, 내가 모르고 살아온, 그 무엇인가가 숨겨져 있는 것만 같다.

어릴 적에는 낙엽들이 굴러서 어디로 가는지 알고 싶었다. 어디로 가는지 끝까지 한번 따라가 보려고도 했다. 낙엽들이 어디로 가서 사라지는지 따라가 보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니, 생각하면 나는 평생 가을을 타는 사람인가보다.

정말 낙엽들은 어디로 가서 사라지는가. 나는 이제는 안다. 낙엽들은 결국 사라져 흙이 된다는 사실. 그러니까 낙엽은 시간의 마법에 걸려 푸른 잎이 되었다가 낙엽이 되었다가 흙으로 되는 것이다. 마치 물이 하늘에 올라가 구름이 되었다가 비가 되어 땅에 내려오는 것처럼.

만물은 그렇게 유전한다. 나는 보았다. 낙엽을 굴리고 가는 것이 시간이라는 것을. 시간이 지나가면서 풀잎은 시들고 푸른 잎은 낙엽이 된다. 시간이 한번 지나가면 모든 것은 다 변한다. 나는 마치 오늘 처음으로 시간이 지나가는 행적을 목격한 느낌이다. 한해의 끝은 가을이다.

가을 다음에 겨울이 남아 있지 않느냐고 할지 모르지만 겨울은 한해의 시작인 봄을 잉태하는 계절이다. 겨울은 동면의 계절이 아니라 만물이 새로 시작할 봄을 마련하는 계절이다. 우리가 어머니 탯속에 있을 때 벌써 나이를 한 살 먹는 것처럼 겨울은 봄을 출산하기 위해 잉태하는 첫 계절이라서 어쩌면 한해의 진정한 시작이라고 할 수도 있다.

나는 그래서 노상 겨울, 봄, 여름, 가을로 사계절을 읊는다. 혹독한 추위의 내력을 견뎌낸 것들만이 봄에 새순을 내민다. 겨울은 모든 것이 휴식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긴 잠 속에서도 부지런히 지하운동을 통해 봄을 품고 기르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낙엽은 떨어진 것으로 임무가 끝나지 않는다. '타고 남은 재가 다시 기름이 됩니다.’(시인 한용운) 싯귀처럼 썩어서 거름이 되어, 흙이 되어 또다시 자연의 운행에 참여한다. 이런 생각을 하고 낙엽을 밟고 가노라니 세상 만물이 다 낙엽의 행로를 가고 있음을 알겠다.

한 잎 낙엽은 우주적 질서, 섭리, 시간에 순종한다. 한 잎 낙엽이 허공을 휘돌다 땅에 떨어지는 순간 나는 거대한 ‘자연의 법칙’을 목격한다. 우리가 알아야 할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낙엽은 마지막 순간에 보여준다.

마치 도박사가 마지막 순간에 회심의 패를 보여주고 판을 쓸어 담듯이. 낙엽은 소리를 지른다, 솔, 솔, 솔. 낙엽은 노래한다, 부슥, 부슥, 부슥. 가을은 이렇게 큰스님의 게송처럼 깊고 짧은 노래를 들려준다.

참으로 신기한 것은 온 산이 봄 여름 내내 푸른 잎으로 덮여 있다가 가을이 짙어가자 갖가지 다른 색깔로 변하는 모습이다. 분명 여기에는 내가 알지 못하는 무슨 신묘가 있어 보인다. 아마도 나뭇잎들이 죽어서 떨어질 참에 각기 다른 아름다운 색깔로 변해야 할 무슨 까닭이 있는 것이리라.

나는 그 이유를 알 것도 같고 모를 것도 같다. 하여튼 낙엽은 떨어져 종당엔 흙으로 되어가면서도 신비스런 색깔을 머금는다. 그래서 나는 낙엽을 함부로 밟지 못한다. 그저 ‘잘 가요, 푸르름이여.’하고 인사를 건넬 뿐이다.

프랑스 시인은 나의 이런 마음을 이렇게 노래한다. ‘시몽, 그대는 좋은가? 낙엽 밟는 소리가/가까이 오라, 우리도 언젠가는 낙엽이 되리니/가까이 오라, 어두운 밤이 오고 바람이 분다’(낙엽-구르몽). 그러나 지금은 겨울을 기다려 봄을 상상해본다. 낙엽이 흙이 되어 데리고 올 기적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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