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시 향 머금은 번안시조(196) 신추우야(新秋雨夜)
한시 향 머금은 번안시조(196) 신추우야(新秋雨夜)
  • 장희구 시조시인/문학평론가
  • 승인 2020.10.26 09: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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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빛 어두워진 성긴 창가에 밤비가 내리네

초봄이 돌아오면 그래도 마음이 활기를 띄기 마련이지만, 가을이 되면 소소해진다. 아마 가을은 그런 계절인가 보다. 매서운 추위가 점점 다가올 양이면, 옷깃부터 새워지고, 고향의 따스한 냄새부터 나기 때문은 아닌지 모르겠다. 거기에 초가을 비가 추적추적 내릴 양이면, 고구마를 구워먹거나 콩을 볶아먹던 시절도 생각난다. 갑자기 가을 되자 깊은 생각은 슬퍼만 지고, 마음속의 괴로운 심사를 가만히 생각해 보았다고 읊었던 시 한 수를 번안해 본다.

新秋雨夜(신추우야) / 춘정 변계량

홀연히 가을오니 생각이 슬퍼지어

앉아서 바라보니 단풍잎 떨어지고

마음속 괴로운 심사 성긴 창가 밤비가.

忽忽逢秋意易悲    坐看楓葉落庭枝

홀홀봉추의역비    좌간풍엽낙정지

算來多少心中事    月暗疎窓夜雨時

산내다소심중사    월암소창야우시

달빛 어두워진 성긴 창가에 밤비가 내리네(新秋雨夜)로 제목을 붙여본 칠언절구다. 작가는 춘정(春亭) 변계량(卞季良:1369-1430)이다. 위 한시 원문을 의역하면 [갑자기 가을 되자 깊은 생각은 슬퍼만 지고 / 앉아서 바라보니 뜰 나뭇가지에서 단풍잎 떨어지누나 // 마음속의 괴로운 심사에 가만히 생각해 보니 / 달빛이 어두워진 성긴 창가에 밤비가 내리네]라는 시심이다.

위 시제는 [초가을 비 내리는 밤]로 번역된다. 조선초 개국의 문을 여는 중추적인 역할을 했던 시인이었지만 우러나오는 시심을 차마 다 억제하지는 못했을 것이다. 가을을 여는 촉촉한 가을비에 하나씩 둘씩 떨어지는 단풍잎에 마음으로 울렁거리는 시심을 차마 주체하기가 어려웠던 모양이다. 가을이면 괴로운 심사를 달래는 선비의 마음도 헤아릴 수는 있어 보인다. 시인은 초초하게 내리는 가을 빗줄기에 괴로운 마음이 더했음을 느끼게 한다. 갑자기 가을이 되자 생각이 슬퍼만 지고, 앉아서 가만히 바라보니 뜰 나뭇가지에서 단풍잎이 하나씩 둘씩 떨어진다고 했다. 이제 멀리서 손짓하며 다가오는 겨울 눈 앞에, 자신을 맡기는 가을에게 늘 그렇게 느끼는 계절이었음을 상기시키고 있다. 소소한 마음은 가을이 되면 누구나 갖게 되는 심사다. 화자 또한 가을이면 쉽게 느낄 수 있는 그러한 심사였음을 알게 한다. 마음속의 괴로운 심사를 가만히 생각해 보는데, 달빛 어두워진 성긴 창가에 밤비가 내리고 있다고 했다. 가을비를 추억한다거나 떠올린다고 소소함을 다 달랠 수는 없겠지만 성긴 창가는 알고 있으리라.

위 감상적 평설에서 보였던 시상은, ‘가을 되자 슬퍼지고 단풍잎이 떨어지네, 마음속 괴로운 심사 성긴 창가 밤비 내려’라는 시인의 상상력을 통해서 요약문을 유추한다.

장희구 시조시인/문학평론가
장희구 시조시인/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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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는 춘정(春亭) 변계량(卞季良:1369-1430)으로 고려 말, 조선 초의 문신이다. 할아버지는 증찬성사 변원이며, 아버지는 검교판중추원사 변옥란이고, 어머니는 창녕 조씨로 제위보부사 조석의 딸이다. 어려서부터 총명하여 여섯 살에 글을 지었다고 한다. 이색과 권근의 문인으로 알려진 인물이다.

【한자와 어구】

忽忽: 홍연히. 갑자기. 逢秋: 가을을 만나다. 意易悲: 생각이 슬퍼지다. 坐看: 앉아서 바라보다. 楓葉: 오동잎. 落庭枝: 정원 가지에 떨어지다. // 算來: 옴을 생각해 보다. 多少: 다소의. 心中事: 마음속의 일. 月暗: 달빛이 어둡다. 疎窓: 성근 창. 夜雨時: 밤비가 내릴 때. 밤비는 내리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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