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 통일 30주년, 그 시작은 상호인정이었다
독일 통일 30주년, 그 시작은 상호인정이었다
  • 조용래(광주대 초빙교수, 전 국민일보 편집인)
  • 승인 2020.10.21 08: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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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용래(광주대 초빙교수/전 국민일보 편집인)
조용래(광주대 초빙교수/전 국민일보 편집인)

지난 3일 독일은 통일 30주년을 맞았다. 1990년 10월 3일, 독일에 대한 부러움과 한반도를 향한 안타까움이 극단적으로 다가왔던 그 기억을 지금도 잊을 수 없다. 당시 나는 일본에 유학 중이었는데 독일 연구를 위해 도쿄 독일문화원에 자주 드나들었다. 마침 그날 아침 독일어 수업이 있었는데 문화원에 축제분위기가 넘쳐 수업도 하는 둥 마는 둥 했다.

독일인 스텝들의 들뜬 대응은 89년 11월 9일 베를린 장벽이 무너질 때부터 나타났다. 문화원에서 만나는 사람마다 통일을 거론했고, 일본인 학생들은 세기적인 변화에 감동하고 칭송하기에 바빴다. 학생들 중 유일한 한국인인 내게는 한반도 분단에 대한 질문이 끊이지 않았다. 질문이 쏟아질 때마다 부러움과 안타까움은 더욱 대조적으로 다가왔다.

그 즈음 한국에서도 새로운 흐름은 있었다. 노태우 정부가 88년 공산권 외교를 천명하며 ‘민족자존과 통일번영을 위한 특별선언’(7·7선언)을 내놨고, 90년 6월에는 한·러 국교수립도 이뤄졌다. 한반도에도 뭔가 훈풍이 부는 듯했다. 기대가 부풀어 오르는 가운데 독일의 통일과정을 지켜보다보니 부러움은 더욱 커졌고, 기대감은 점점 초조함으로 바뀌고 있었다.

그 이듬해 1월 다른 각도에서 독일 통일을 경험할 수 있는 기회를 얻었다. 연구자료 수집을 위한 구 동독지역인 작센 주 방문과 두어 달 간의 현지 체류는 많은 것을 생각하게 했다. 작센의 주도 드레스덴 역 담벼락을 비롯해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곳마다 붉은 페인트로 ‘Wir sind alle Ausländer!!!(우린 모두 외국인이다)’라고 쓴 낙서가 자주 눈에 띄었다.

그 낙서에는 구 동독사람들의 불만, 즉 통일 독일의 주인은 서독사람들일 뿐이고 동독사람들은 찬밥 신세에 불과하니 사실상 이방인이라는 자조가 엿보였다. 낙후한 경제 탓에 일자리도 제대로 얻지 못해 결국 하층민으로 전락하는 게 아니냐는 불안이 담겨 있는 듯했다. 그곳에는 통일의 기쁨보다 통일에 대한 불신과 불만, 미래에 대한 불안감으로 가득했다.

통일은 쉽게 이룰 수도 없지만 이룬다 한들 그 후속 대응에 치밀함이 없다면 또 다른 아픔을 동반할 뿐이다. 그런데 지난 30년 동안 독일은 구 동독 주민들의 불만과 좌절을 끌어안고 다시 유럽의 중심국가로 거듭났다. 한 때 동독지역 실업률은 20%를 웃돌 만큼 심각했지만 사회개혁정책을 통해 마침내 모든 애로를 극복한 독일 사례는 또 다른 부러움이 아닐 수 없다.

독일 통일과정을 한반도에 단순 적용할 수는 없다. 무엇보다 유럽과 동아시아의 지정학적 상황이 다르다. 그럼에도 독일 통일을 살펴봐야 하는 것은 그 전 과정이 치밀한 구상과 구체적인 실천을 통해 이뤄졌기 때문이다. ‘통일구상-선포-정책실행-계승’ 등의 흐름 속에서 국제적인 외부변화가 닥쳤을 때 그들은 머뭇거리지 않고 통일의 물꼬를 텄다.

독일 통일구상은 에곤 바르(1922~2015)가 63년 내놓은 ‘접근을 통한 변화 정책’, 이른바 동방정책이다. 이 구상은 72년 사회민주당(SPD) 소속의 빌리 브란트 총리(재임 69~74)가 선포해 정책으로 추진하기에 이른다. 구상의 핵심은 소련의 영향력 인정, 국가로서 동독 인정, 유럽의 동서 긴장 완화를 위한 미·영·프와의 협력강화 등이다.

동독을 국가로 인정하자는 것에 대해 서독 내에서도 분단 고착화 위험성을 앞세워 반대가 적지 않았다. 하지만 브란트는 내부를 진득하게 설득했다. 특히 정권이 브란트의 사회민주당에서 기독민주연합(CDU)으로 바뀐 후에도 동방정책은 고스란히 계승됐다. 동방정책이 63년 구상에 이어 정책으로 선포, 계승되면서 서독은 냉전붕괴라는 결정적 순간을 제대로 포착해 통일을 이뤘다.

내부 자극과 외부 자극을 다지기 위해 끊임없이 국민을 설득하는 한편 구 소련은 물론이고 미·영·프 등 인접 서방국가와의 협력 프레임을 돈독하게 유지한 것이 독일 통일의 비결이다. 그리고 그 시작은 서독이 동독을 국가로 인정하는 데 있었다. ‘바르 구상’에 이어 73년 ‘동서독 기본조약’ 안에 국가로서 동서독을 서로 인정할 것을 명기한 것이 바로 그것이다.

남북한 역시 서로의 존재를 용인하려는 시도가 없지 않았다. 72년 7·4 공동성명, 92년 남북기본조약, 2018년 판문점 선언 등이 그것이다. 하지만 여전히 국가로서 서로를 동등하게 인정하려는 태도는 부족하다. 보수는 북한에 대한 존재를 용인할 수 없다고 반발해왔고, 진보 역시 상호인정이 분단 고착화와 다르지 않다는 비판적인 태도를 굽히지 않았다.

통일은 서로 합치는 주체에 대한 분명한 존중과 인정이 없으면 감성적인 구호에 불과하거나 무력행위를 감추려는 전술적인 언어가 될 수밖에 없다. 문재인 정부가 종전선언을 강조하는 것도 남북이 서로를 용인하고 존중하기 위해 출발선부터 제대로 다지자는 뜻일 터다. 새로운 판을 열어야 앞으로 있을 수 있는 결정적 변화에 제대로 대응할 수 있다.

지금은 평화공존이 우선이다. 상대를 인정하지 않고 어찌 평화공존이 가능하며 나아가 통일의 길을 구할 수 있겠는가. 우리 내부를 설득하고 주변국들과의 협력프레임 구축을 위한 노력이 더 더욱 절실하다. ‘우리 민족끼리’를 앞세우기보다 ‘보편적 이웃나라 관계’를 먼저 만들자. 그 시작, 우리도 맛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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