숲에 산밤을 심다
숲에 산밤을 심다
  • 문틈 시인
  • 승인 2020.10.15 14: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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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아파트 동의 재활용 처리장에는 이따금 까치가 한두 마리 날아온다. 쓰레기를 뒤지러 오는 것이다. 음식물 쓰레기는 따로 밀폐된 통에 버리기 때문에 쓰레기장에는 까치가 먹을 만한 것이 없다. 그런데도 까치는 종이 박스며, 비닐봉지며, 플라스틱 무더기를 부리와 발로 뒤진다.

아마도 그것들 중에는 드물게 먹다 남은 음식 찌꺼기가 남아 있나 보다. 나는 이 장면을 볼 때마다 까치에 대해서 연민의 감정을 느낀다. 까치는 사람으로 치자면 멋진 정장 차림을 한 인텔리로 쳐줄만하다.

그런 까치가 쓰레기장을 뒤지는 것은 체면에 썩 어울리지 않는 모습이다. 나는 특별히 까치를 좋아하는 사람은 아니지만 까치의 체신머리에 어울리지 않는 비렁뱅이 같은 행동에 측은지심을 느낀다.

직장에 다니던 한때 주머니에 조나 쌀을 넣고 다니면서 길거리에서 마주치는 새들을 위해 흩뿌려준 일도 있다. 하지만 까치가 좋아하는 메뉴를 알지도 못하거니와 솔직히 까치가 우짖는 소리는 좀 귀에 거슬리기도 해서 비호감이긴 하다.

이제 생각난다. 까치가 도토리를 좋아하는 것을 본 적이 있다. 그때 가로수로 심어놓은 상수리나무에서 도토리들이 떨어져 길바닥에 굴러가고 있었는데 내가 그 굴러가는 도토리를 주우려고 걸음을 옮기자 어디서 까치 한 마리가 잽싸게 그 도토리 쪽으로 날아왔다.

나와 까치가 도토리를 놓고 경쟁을 벌이게 된 꼴이다. 물론 나는 까치에게 그 도토리를 양보할 마음으로 즉시 걸음을 멈추었는데 까치가 내게 양보를 할 셈이었는지 까치는 다른 곳으로 날아갔다. 그때 나는 까치를 훼방 놓게 된 처지가 되어버려 되게 미안스러웠던 적이 있다.

이제야 까치가 쓰레기장을 뒤지러 온 까닭을 조금은 알 것도 같다. 앞 숲에는 상수리나무숲이라고 할 만큼 가을에는 도토리가 많이 떨어진다. 이것을 죄다 주민들이 주워가는 바람에 까치가 먹을 차지가 못되는 것이다.

내가 관찰한 바에 의하면 상수리나무들은 다람쥐나 까치 같은 숲의 식구들에게 먹이를 대주고 그 대가로 그들은 일부 열매를 땅 속에 파묻어주는 계약을 맺은 것으로 보인다. 이 나무와 동물들이 맺은 계약 관계에 의해서 숲은 유지된다. 이런 숲의 사정을 아랑곳하지 않는 사람들은 세상에 먹을 것이 천지인데도 굳이 숲에 떨어진 도토리, 밤 같은 것을 주워간다.

내가 그때 도토리를 주우려 했던 것은 도토리를 아파트 단지 안의 녹지에 심을 생각으로 그러했던 것이다. 실제로 내가 심은 도토리들은 싹을 내밀어 자라는 것을 보았다. 그때의 기쁨이란 대단한 것이었다! 마치 내가 아파트 단지를 온통 상수리나무숲으로 만들 것만 같았다.

나중에 봄에 풀을 베는 사람들이 와서 그것들을 웃자란 풀과 함께 베어버리고 말았지만. 나는 그때 생각이 나서 또다시 엉뚱한 짓을 하게 되었다. 아내와 함께 인적이 드문 교외에 바람 쐬러 나갔다가 산밤들이 길에 함부로 떨어져 있는 것을 보고 그때 일이 떠올랐던 것이다.

산밤은 두툼한 가시 옷을 입고 떨어진다. 날카로운 가시투성이의 밤송이를 보면 밤이 얼마나 지극히 자손 보전에 신경을 쓰는지 금방 알 수 있다. 떨어진 밤송이는 ‘제발 나를 손대지 말아요’라는 바디 랭귀지를 하고 있는 것이다.

산밤은 알이 자잘하다. 밤송이 안에 세 개의 알이 사이좋게 착 달라붙어 있다. 떡 벌어진 밤송이 안에 귀여운 세 알의 밤톨이 들어 있는 모습은 절로 미소를 짓게 한다. 고것들, 참 우애 깊은 형제들 같다. 나는 밤송이를 신발로 짓이겨 밤톨을 꺼내면서 이런 생각이 들었다.

산밤나무가 밤송이 안에 새 개의 밤톨을 넣어둔 까닭은 땅에 떨어져 새 개 중 하나만이라도 싹을 틔어 대를 이어가기를 바라는 소망이 담겨 있다고. 내 눈에는 분명 밤나무의 그런 뜻이 엿보였다. 그래서 나는 산밤을 주워가지고 와서 아파트 앞에 있는 작은 숲에 심어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드디어 오늘, 나는 주워온 밤알이 든 봉지와 호미를 들고 단지 앞 쌈지공원 숲으로 들어갔다. 숲은 최근 몇 년간 죽어가는 나무가 많아져서 썰렁한 느낌이 들어 늘 안타까웠다. 밤을 심을 만한 곳을 물색하면서 햇볕이 잘 들고 다른 나무들과 경쟁이 덜할 법한 곳들을 골라 호미로 흙을 파고 밤을 심었다.

91개의 밤톨을 심었는데 만일 한 알도 실패하지 않고 다 싹을 틔워 쑥쑥 자라준다면 20년 후에는 앞 숲은 온통 밤나무숲으로 변해 있을 것이다.

숲길을 지나가던 한 여자가 내게 물었다. “지금 뭐하시는 거예요?” “밤알을 심고 있습니다.” “싹이 나나요?” “20년 후에는 밤이 열릴 거예요.” 그때가 되면 사람들이 밤을 주워가도 먹을 것이 모자라 쓰레기장을 찾아오는 까치에게도 조금은 체면을 지키는 날이 오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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