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시 향 머금은 번안시조(182) 제위보(濟危寶)
한시 향 머금은 번안시조(182) 제위보(濟危寶)
  • 장희구 시조시인/문학평론가
  • 승인 2020.07.20 13: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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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끝에 남아 있는 이 향기를 어찌 씻어 내리오

『고려사』 에 따르면, 한 부인이 죄로 인하여 제위보(고려시대에 빈민이나 행려자들을 구호하는 일을 맡은 관청)에서 일하다가 자기 손목이 외간 남자에게 잡혔다. 그 치욕을 씻을 길이 없음을 한스럽게 여겨 이 노래를 지어 원망했다 한다. 이로 보아 이 작품은 여인의 정절과 부덕을 그 주제로 하고 있다고 추정된다. 석 달 동안이나 연달아서 비가 주룩주룩 내린다고 한들, 손끝에 남아 있는 이 향기를 어찌 씻어 내겠느냐며 읊었던 시 한 수를 번안해 본다.

濟危寶(제위보) / 익제 이제현

빨래가 시냇가의 수양버들 밑에서

내 손잡고 노닥인 백마 탄 도련님

손끝에 남은 향기를 어찌하여 씻으리.

浣紗溪上傍垂楊    執手論心白馬郞

완사계상방수양    집수논심백마랑

縱有連簷三月雨    指頭何忍洗餘香

종유연첨삼월우    지두하인세여향

손끝에 남아 있는 이 향기를 어찌 씻어 내리오(濟危寶)로 제목을 붙여본 칠언절구다. 작가는 익재(益齋) 이제현(李齊賢:1287~1367)이다. 위 한시 원문을 의역하면 [빨래터 있는 시냇가 수양버들 밑에서 / 내 손 잡고 노닥였던 백마 탄 도련님이 있었다네 // 석 달 동안이나 연달아서 비가 주룩주룩 내린다고 한들 / 손끝에 남아 있는 이 향기를 어찌 씻어 내리오]라는 시심이다.

위 시제는 [백성을 위한 구호 및 의료 기관]으로 번역된다. 제위보濟危寶는 구호와 의료를 담당하는 상설기관이었다. 그런데 이제현의 한역시는 그 반대다. 즉 남녀상열지사男女相悅之詞의 내용을 담고 있다. 이와 같이 한역시와 노래 해설이 서로 어긋나는 것은 [고려사]를 편찬한 조선 초기 유학자들이 유가적 이념에 맞게 고의적으로 왜곡한 해설이든지, 아니면 원래 해설과 일치하는 노래를 시인 자신의 의도에 맞추어 번안하였든가 둘 중의 하나겠다. 시인은 여인심에 의한 시상 주머니를 털어내기에 급급한 모습을 본다. 빨래터 시냇가 수양버들 밑에서 내 손을 꼬옥 잡고 노닥였던 백마를 탄 도령을 생각해 낸다. 과거회상적인 아련한 추억일 것이다. 화자는 그래도 지워지지 않는 아련한 추억의 한도막이 있다면 가볍게 잡아주었던 손목의 따스함이었으리라. 석 달 동안이나 연달아 비가 내려 모든 것은 다 앗아갔다고 하더라도 손끝에 남은 향기 도무지 씻어 낼 수 없다는 여심을 담아냈다. 다정도 병인 양하여 손끝에 남아있는 짜릿한 도령의 향기만큼은 잊을 수 없다는 포근함의 여운을 진하게 표현했으렸다.

위 감상적 평설에서 보였던 시상은, ‘시냇가의 수양버들 백마를 탄 도령있네, 석달 비가 내린데도 손끝 향기 어찌하리’라는 시인의 상상력을 통해서 요약문을 유추한다.

장희구 시조시인/문학평론가
장희구 시조시인/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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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는 익재(益齋) 이제현(李齊賢:1287~1367)으로 고려 후기의 문신이자 시인이다. 1303년 권무봉선고판관 벼슬에 올라 관직생활을 시작했다. 연경궁 녹사를 거쳐 1308년 예문춘추관에 선발되고 사헌규정, 전교시승, 삼사판관, 서해도 안렴사 등을 역임하였던 인물이다. [익제난고]와 [소악부]가 전한다.

【한자와 어구】

浣紗: 빨래터. 溪上: 시내 위. 傍垂楊: 수양버들 곁에서. 執手: 내 손을 잡다. 論心: 마음을 논하다. 白馬郞: 백마를 탄 도련님. 縱有: 마음대로 내리다. 連簷: 연달에 처마에 내리다. 三月雨: 석 달 동안 비가 내리다. 指頭: 손꽅에 何忍: 어찌 차마. 洗餘香: 남은 향기 씻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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