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라하의 성 프란치스코 성당'
'프라하의 성 프란치스코 성당'
  • 김세곤 호남역사연구원장
  • 승인 2020.06.29 09:31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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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시시의 성 프란시스코 성당

골목길을 서성거리다가 집합 장소인 카렐 4세 동상 광장으로 돌아왔다. 자유시간이 10분 정도 남았다. 카렐 4세 동상 오른편에 있는 성당 입구로 갔다. 입구에는 ‘개방, 무료입장’이란 안내판이 있다. ‘내일, 오르간 콘서트’라고 적힌 안내판도 좌우에 있다.

좌) 성당 입구, 우) 성당 내부
좌) 성당 입구, 우) 성당 내부

성당으로 들어갔다. 성당에는 아무도 없다. 필자 부부는 성당을 둘러보면서 사진을 몇 장 찍고 나왔다.

이윽고 성당 입구 위의 황금 십자가를 들고 있는 조각상을 찬찬히 보았다. 조각상이 어디에서 많이 본 사람이다. 인터넷으로 검색했더니 성당 이름이 ‘아시시의 성(聖) 프란치스코’ 성당이다. 그렇다면 조각상은 성 프란치스코였다.

불현듯 이탈리아 아시시의 프란치스코 성당과 크로아티아 두브로브니크의 프란치스코 수도원이 생각났다. 아시시는 2016년 3월에, 드브로브니크는 2017년 6월에 방문한 바 있다.

▷아시시의 성인 프란치스코

평생을 청빈하게 살며 이웃 사랑에 헌신한 성 프란치스코(1182~1226)는 이탈리아 아시시의 부유한 옷감 상인의 아들로 태어났다. 젊어서 향락을 추구하였던 그는 1202년에 이웃 도시 페루자와의 싸움에서 포로가 되어 1년간 감옥에 있으면서 말라리아를 앓았다.

아시시의 성 프란치스코 성당 외관
아시시의 성 프란치스코 성당 외관

이것이 계기가 되어 그는 예수 그리스도의 모범에 따라서 살 것을 결심했다. 1205년 어느 날 프란치스코는 아시시 성문 밖에 허물어진 산다미아노 성당에 들어갔다가 제단 위에 걸려 있던 십자가상에서 "프란치스코야, 폐허가 된 내 집을 다시 세워라"라는 음성을 들었다. 그는 집으로 달려가 아버지 가게의 옷감을 팔아서 마련한 돈을 산다미아노 성당의 사제에게 주었다.

이 사실을 알고 화가 난 아버지는 그를 주교 앞으로 끌고 갔다. 이러자 프란치스코는 아무 말 없이 옷을 모두 벗어서 아버지에게 주고는 말했다.

"지금까지 나는 당신을 아버지라고 불러왔습니다. 그러나 이제부터 진심으로 부를 수 있는 이름은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밖에 없습니다"

이후 프란치스코는 재산과 가족을 포기하고 청빈과 이웃 사랑에 헌신하였다.

1209년 프란치스코는 교황 인노첸시오 3세에게 수도회 설립 인준을 요청하기 위해 11명의 제자들과 함께 로마로 갔다.

그들은 교황을 만났다. 처음에 교황은 프란치스코가 제출한 회칙의 생활 양식이 너무나 이상적이며 엄격하다는 이유로 인준을 유보하였으나, 그날 밤 꿈에서 쓰러져가는 산 조반니 대성전을 프란치스코가 어깨로 부축하여 세우는 장면을 보고, 다음 날 수도회를 구두로 인준하였다.

이후 ‘작은 형제들의 모임(프란치스코회의 정식 명칭)’의 수도사들은 예수의 생활을 본받아 청빈하게 지내면서 가난한 사람과 병든 사람을 위로하였다.

이윽고 프란치스코는 1212년에 18세의 성녀 클라라(1194∼1253)에게 권유하여 '가난한 클라라 수녀회'를 설립하게 하였다.

이들 탁발 수도사들은 사역한 지 10년도 안 되어 그 수가 5천 명이나 되었고, ‘작은 형제회’는 이탈리아 밖으로 퍼져나갔다.

1224년 9월에 프란치스코 아시시 근처의 산상에서 그리스도의 고난에 대해 묵상하던 중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의 상처를 닮은 다섯 군데의 흔적이 그의 양손, 발, 옆구리에 나타났다. 이는 프란치스코의 신성함을 나타내는 징표였다.

프란치스코는 성흔(聖痕)을 받은 후 2년을 더 살았는데, 계속 고통에 시달렸고 눈이 거의 먼 상태였다. 1226년 10월 4일에 그는 아시시에서 선종했고, 1228년에 그레고리오 9세에 의해서 시성(諡聖)되었다. 묘소는 아시시의 성 프란치스코 성당 지하에 있다. 아쉽게도 성당 내부는 사진 촬영이 금지되어 있다.

▷두브로브니크 프란치스코 수도원

크로아티아 두브로브니크에도 프란치스코 수도원과 박물관이 있다. 필레 문을 막 지나 오노프리오스 분수 맞은 편에 프란치스코 성당과 약국 그리고 박물관이 있다. 약국에는 장미 크림을 판다.

좌) 성당의 제단, 우) 기도하는 프란치스코
좌) 성당의 제단, 우) 기도하는 프란치스코

프란치스코 수도원은 1234년에 프란치스코 수도사들이 두브로브니크에 정착한 뒤 1317년에 가난한 자와 병자를 위해 수도원을 세웠지만 17세기 중반 대지진으로 모두 파괴되었다가 다시 세웠다.

성당의 제단에는 겉옷만 걸친 수도사가 십자가를 들고 있고, 벽에는 기도하는 프란치스코가 그려져 있다.

한편 2013년에 교황으로 선출된 아르헨티나 출신 프란치스코 교황은 가난한 이들의 성자인 ‘아시시의 성(聖) 프란치스코’의 길을 좇겠다며 그 이름을 선택했다.

이렇게 유럽여행을 하다 보면 때로는 카톨릭 성인(聖人)의 삶을 공부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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