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머니의 6.25 70주년
어머니의 6.25 70주년
  • 문틈 시인
  • 승인 2020.06.22 09:04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어머니는 6.25동란 중에 큰 화를 당할 뻔했다. 그 시절 청년들은 죄다 군으로 징집되어 전선으로 나가고 마을엔 노인과 여자들만 남아 있었다. 밤중에는 산사람들이 낡은 군화를 신은 채 함부로 방으로 들어와 먹을 것을 강탈해가던 시절이었다.

전쟁이 막바지로 치닫던 어느 날 인민군이 마을의 모든 여자들을 공회당에 모이라고 했다. 어머니는 큰아들을 등에 업고 영문을 모른 채 나갔다. 나가면서 이웃 사람에게 물어보았지만 아무도 그 영문을 몰랐다. 나가는 일이 께름칙했다.

이웃 아짐이 어차피 안나가면 닦달할 것이니 나가자는 것이었다. 공회당에 모인 마을 부녀자들 가운데 일부가 역시 아이들을 등에 업거나 손을 잡고 나왔다. 마을 사람들을 노지에 세워놓고 인민군 몇이 뭐라고 떠들면서 거총 자세를 취했다.

그때, 하늘에서 갑자기 비행기 소리가 들리더니 스피커로 ‘인민군은 포위되었으니 자수하라!’는 메지지가 흘러나왔다. 인민군들은 총을 들고 냅다 산으로 도망을 쳤다. 위기일발의 순간이었다. “그때 하마트면 나 영락없이 죽을 뻔했다.”

어머니는 6.25를 생각하면 지금도 몸서리를 친다. 후퇴를 앞두고 왜 죄 없는 여자들을 죽이려고 했을까.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가 안가는 대목이다.

어머니는 가슴에 태극기와 인공기를 지니고 다니면서 인민군을 만나면 인공기를, 국군을 만나면 태극기를 꺼내 흔들면서 목숨을 부지했다. 그렇게도 신산한 때를 어머니는 잘도 이겨내고 살아남았다.

6.25동란이 일어난 지 70년, 아직도 6.25는 끝나지 않았다. 70년 동안 휴전상태로 있을 뿐이다. 김일성은 6.25가 끝나고 나서 북한 간부들을 모아놓고 ‘남쪽에 남조선이 있는 한 조선반도에 영원한 평화는 없다.’고 말했다.

그동안 남북은 평화를 탁상에 올려놓고 정상회담을 여러 차례 하고, 평화의 조건으로 비핵화를 타개하기 위해 노력을 기울였다. 한때 ‘봄은 온다’는 말에 들뜨기도 했지만 결국 원점으로 돌아가고 말았다. 남북 사이에 평화를 건설하는 것이 서로 이해관계가 크게 달라 이다지도 힘들다.

북한은 6.25를 ‘조국해방전쟁’이라고 부르고, 한국은 ‘6.25전쟁’, ‘한국전쟁’이라고 부른다. 북한은 전쟁의 목적을 분명히 하고 있으나 한국은 6.25를 전쟁의 주체가 모호한 명칭으로 부른다.

솔직히 나는 이 점에서 조금 혼란스럽다. ‘6.25남침전쟁’이라 불러야 침략을 당한 우리 입장에서 맞는 것이 아닐까싶다. 그거야 어쨌든 역대 정부는 북한을 국제사회의 일원으로 끌어내기 위해 ‘햇볕정책’, ‘포용정책’, ‘비핵정책’을 펴왔다.

그 성과는 안타깝게도 북한은 문을 닫아걸고 도움만을 요구할 뿐 전혀 변할 생각이 없는 것처럼 보인다. 안타까운 현실이다.

어머니는 ‘다시는 이 땅에 전쟁이 없어야 된다’고 되뇌인다. 6.25전쟁의 기억이 잊혀져가고 있다. 전쟁 체험 세대가 사라지고 나면 6.25의 기억도 희미해질지 모른다. 과거를 잊으면 과거가 되풀이된다. ‘역사는 반복된다’는 말이 그래서 생겨난 말이다.

휴전이 성립되고 전선에서 마을에 살아 돌아온 청년들은 몇 사람이 되지 않았다. 전쟁이 끝나고 한참 뒤에야 어머니는 미군의 군수공장에 다녔던 아버지를 재회할 수 있었다. 전쟁은 피아간뿐만 아니라 마을 사람들 사이에도 갈등을 야기했다. 이 편이냐, 저 편이냐. 귀한 목숨이 헌 신짝처럼 취급되던 시절이다.

어머니는 6.25전쟁 중 마을에 일어난 일들을 지금도 소상히 기억한다. 누구네 는 빨치산에 끌려가 죽었고, 누구네 아들은 의용군으로 끌려가 낙동강 전선에서 죽었고…. 거의 3차 대전이라고 할 정도로 크게 벌어졌던 6.25전쟁 세대가 다 사라지고 나면 한국은 어찌 될까. 어머니의 걱정거리다.

북한은 대를 이어서 전쟁 학습을 시킨다. 남조선 해방을 국가의 목적으로 배워준다. 이에 비해 우리는 너무 평화만을 가르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든다. 자유를 지키는 것을 개인, 사회, 국가의 최우선 목표로 삼아야 한다.

미국은 월남전에서 죽은 미군병사들의 이름을 모두 석비에 새겨 기념한다. 6.25가 끝난 지 70년이 되었어도 병사들의 유골을 찾아 본국으로 모셔간다. 국가가 전사자를 죽은 후에도 끝까지 보살핀다.

전후 세대가 6.25를 안 잊었으면 한다. ‘나쁜 평화가 전쟁보다 낫다’고 외치는 사람도 있으나 이런 생각이 혹시 아무리 나쁜 통일도 분단보다는 낫다고 하게 될까봐 두렵다. 나쁜 평화는 없다. 나쁜 전쟁이 있을 뿐이다.

“통일은 못하더라도 남북 간에 서로 왔다갔더라도 할 수 있으면 좋겠다.”

어머니의 한 맺힌 비원이다. 나도 그런 생각이다. 어머니의 6.25 이야기는 자유에 취해 있는 내게 죽비를 치는 것만 같다. 우리에게 자유는 피로 얻은 숭고한 가치다.

최신 HOT 뉴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