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시 향 머금은 번안시조(177) 산거춘일(山居春日)
한시 향 머금은 번안시조(177) 산거춘일(山居春日)
  • 장희구 시조시인/문학평론가
  • 승인 2020.06.15 09:5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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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밭 밖의 복사꽃이 홀연히 붉음을 놓았다네

산 중에 살면 깊은 생각에 잠길 때가 많다. 찾아오는 사람도 드물고, 연락할 방법도 마땅찮아 그저 그렇게 자연과 벗을 하면 살아간다. 산속의 봄을 새로운 생기를 돋게 했겠다. 이 생기를 보면서 은은한 봄을 만나게 된다. 봄은 그렇게 반가운 손님이다. 얼마나 반가웠으면 봄처녀라고 했을까 하는 생각에 젖는다. 소곤소곤 대화에 취한 중에 두 수염이 눈처럼 하얀 것 알지 못하고 번화한 꽃받침 꺾어 머리에 꽂고 봄바람 앞에 선다고 읊었던 시 한 수를 번안해 본다.

山居春日(산거춘일) / 왕백

촌집의 어젯밤에 밤비가 부슬부슬

대발 밖 복사꽃이 피는 것 붉음은

취중에 꽃받침 꺾어 머리 꽂고 앞에 서네.

村家昨夜雨濛濛    竹外桃花忽放紅

촌가작야우몽몽    죽외도화홀방홍

醉裏不知雙鬢雪    折簪繁萼立東風

취리부지쌍빈설    절잠번악입동풍

대밭 밖의 복사꽃이 홀연히 붉음을 놓았다네(山居春日)라고 제목을 붙여본 칠언절구다. 작자는 왕백(王伯:1277~1350)이다. 위 한시 원문을 의역하면 [촌집에도 어젯밤에는 부슬부슬 비가 내렸었지 / 대밭 밖 복사꽃은 홀연히 붉음을 놓았었는네 // 술에 취한 중에 두 수염이 눈처럼 하얀 것 알지 못하고 / 번화한 꽃받침 꺾어 머리에 꽂고 봄바람 앞에 서네]라는 시심이다.

위 시제는 [산에서 봄날을 보내다]로 번역된다. 봄이 왔지만 봄 같지 아니한 이른 꽃이 피었다가 한 바탕 비를 맞고 꽃이 지고 말았음이 시상의 주머니에 가만히 만지작거림을 보이는 작품이다. 꽃을 얼마나 아끼고 사랑했는지도 알 수 있을 것만 같고, 복사꽃 보는 것을 즐기며 꽃을 보러 갔다가 취중에 도리어 수염이 하얀 줄을 알지도 못하고 꽃받침만 꺾어 봄바람 앞에 엎친 데 덮친 격이었음을 보인다. 시인은 산에 살며 봄을 만끽하면서 복사꽃 피는 정경에 취했던 모양이다. 촌집은 어젯밤에 비가 부슬부슬 내려 대밭 밖 복사꽃이 홀연히 붉음을 놓아 피었다고 했다. 이미 복사꽃이 피었지만 비를 맞고 져버렸다는 시적인 그림을 그려내고 있음이 보인다. 화자는 복사꽃을 감상하다가 취한 중에 자신의 처지를 깜박 망각했던 모양이다. 복사꽃을 감상하다가 취한 중에 두 수염이 눈처럼 하얗게 된 것도 마쳐 알지 못하고, 번화한 꽃받침만 꺾어 머리에 꽂고는 봄바람 앞에 섰다고 했다. 하얀 수염에 번화한 꽃받침(繁萼)만 꺾어서 머리에 곱게 꽂았으니 흰 수염에 흰 머리를 그만 덧붙이는 격이 되었음을 보여준다.

위 감상적 평설에서 보였던 시상은, ‘어젯밤 비 내렸는데 복사꽃이 붉게 피고, 두 수염이 하얀 것 알아 꽃받침에 봄바람만’이라는 시인의 상상력을 통해서 요약문을 유추한다.

장희구 시조시인/문학평론가
장희구 시조시인/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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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는 왕백(王伯:1277~1350)으로 고려 후기의 문신이다. 규정, 좌사보, 우사의, 집의, 사복정 등을 역임하였다. 1380년(우왕 6) 경복흥이 이인임의 모함을 받아 청주에 유배될 때 함께 유배되었다. 뒤에 풀려나왔으나 간신 김흥경과 가까이 지내다가 결국 우왕 때 파직을 당했던 인물로 알려진다.

【한자와 어구】

村家: 시골 집. 昨夜: 어젓밤. 雨: 비. 濛濛: 부슬부슬. 가랑비 오다. 竹外: 대밭 밖. 桃花: 복사꽃. 忽放紅: 홀연히 붉어지다. // 醉裏: 취한 중에 不知: 알지 못하다. 雙鬢: 귀밑머리. 雪: 눈. 여기선 하얗다는 뜻. 折簪: 머리에 꽂다. 繁萼: 번화한 꽃받침. 立東風: 동풍 앞에 서다. 동풍이 부는 쪽으로 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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