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라하 천문시계'
'프라하 천문시계'
  • 김세곤 호남역사연구원장
  • 승인 2020.06.15 09: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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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구시가지 광장

단체여행객들은 프라하 화약탑에서 구시가지 광장으로 이동한다. 11세기부터 형성된 구시가지 광장은 얀 후스 동상, 구시청사와 천문시계, 틴 성모 교회 등 볼거리가 많다. 지금은 크리스마스 마켓이 들어서 있다.

구시가지 광장 크리스마스 마켓
구시가지 광장 크리스마스 마켓

▷ 천문시계

구시가지 관광의 핵심은 구시청사 남쪽 벽에 있는 천문시계이다. 천문시계는 1410년에 설치되었는데, 세계에서 3번째로 오래된 천문시계란다.

현지 가이드는 소매치기를 조심하라는 말부터 했다. 시계를 보면서 소매치기를 당한 경우가 너무 많다는 것이다.

실제로 필자도 그런 경험을 한 적이 있다. 2007년 10월에 프라하를 처음 방문했을 때, 밤에 천문시계를 보다가 일행 중 한 사람이 돈이 든 손가방을 소매치기 당할 뻔했다. 젊은 집시 남녀 한 쌍이 소매치기였다.

이어서 현지 가이드는 천문시계를 설명한다. 시계는 상하 2개의 큰 원형으로 되어 있다. 위쪽 시계를 칼렌다륨, 아래쪽 시계를 플라네타륨이라고 부르고, 위쪽 시계 위에는 두 개의 창문이 있다.

천문시계와 조각상들
천문시계와 조각상들

위쪽 시계(칼렌다륨)는 천동설의 원리에 따른 해와 달과 천체의 움직임을 묘사하였다. 일반적으로 1년에 한 바퀴씩 돌면서 연, 월, 일, 시간을 나타낸다.

아래쪽 시계(플라네타륨)는 12개의 계절별 장면들을 묘사하여 보헤미아의 농경 생활을 보여준다. 아래 시계의 둥근 판 중심에는 구시가의 문장이 있고 둘레에는 별자리가 새겨 있다. 또 이를 둘러싸고 한 해의 열두 달을 농민의 생활로 표현한 그림이 있다.

그런데 천문시계의 하이라이트는 매시 정각에 울리는 종소리이다.

위쪽 시계 오른쪽에 매달린 해골(죽음을 상징)이 자신의 오른손에 감긴 줄을 잡아당기면 두 개의 창문이 열리면서 각각 6명씩 12 사도들이 줄줄이 지나가고 황금 수탉이 홰를 치고 울면 시계는 울면서 시간을 알려준다. 그 와중에 투르크인 상징 조각상이 고개를 좌우로 흔들어 동의하지 않은 모습을 보이고, 허무를 상징하는 조각상은 거울을 보며 지난 세월을 회고하고, 고리대금업자의 모습을 한 유대인 조각상(탐욕을 상징)이 움직인다. 시간은 채 1분도 안 걸린다. 아쉽게도 다음 일정 때문에 종소리를 못 들었다.

▷ ‘21 VI 1621’

그런데 필자의 관심은 천문시계보다 구시가지 광장 바닥에 있는 27개의 십자가와 ‘21 VI 1621’이라는 표시를 찾는 일이었지만, 허사였다.

프라하 구시가지 광장
프라하 구시가지 광장

1621년 6월21일에 카톨릭(구교)의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 왕가는 프로테스탄트(신교)인 체코의 귀족 27명을 구시가지 광장에서 참수형에 처했다.

1415년 7월에 종교개혁자 얀 후스가 콘스탄츠에서 화형당하자, 후스의 추종자들은 크게 분개하였다. 1419년 7월에 급진적인 사제 젤리프스키가 이끄는 후스파는 프라하 시청사를 습격하고 13명의 시의회 의원들을 창밖으로 내던지고 성당을 파괴했다. 첫 번째 창문 투척 사건이었다. 이 충격에 바츨라프 3세가 뇌졸중으로 사망하고 합스부르크 왕가의 황제 지기스문트가 뒤를 이었는데 후스파는 그의 즉위를 인정하지 않았다. 이러자 교황 마르티노 5세의 칙서를 받은 십자군이 보헤미아로 향하였는데, 1420년 7월에 후스파 군대는 프라하 교회의 비토코프 언덕에서 십자군을 분쇄했다.

이후 보헤미아는 1526년부터 합스부르크 왕가의 지배를 받았는데 루돌프 2세 치하인 1609년 이후에는 어느 정도 신앙의 자유가 보장되었다. 하지만 1617년 페르디난트 2세가 왕위에 오르자 신교 탄압에 나섰다.

이러자 1618년에 신교 귀족들이 프라하 성으로 몰려가 성직자 2명과 비서 1명을 창문 밖으로 던졌다. 두 번째 창문 투척 사건이었다. 그런데 창문에 던져진 이들은 다행히도 오물이 쌓인 곳에 떨어져 무사했다. 카톨릭 측은 이것을 하늘이 베푼 기적이라며 하늘이 자신들의 편이라고 했다.

창문투척 사건은 이후 30년 전쟁(1618-1648)의 불씨가 되어 유럽을 혼란의 도가니로 몰아넣었다.

창문투척 사건이 일어난 2년 후인, 1620년에 프라하 외곽의 빌라 호라(하얀 산)에서 벌어졌던 전투에서 신교 군대는 구교 군대에게 두 시간 만에 참패당하고 말았다.

그 결과 1621년 6월21일에 프라하의 구시가 광장에서 27명의 체코 귀족들이 참형되었다.

(정태남 지음, 동유럽 문화도시기행, 21세기 북스, 2015, p 55-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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