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라하의 봄'
'프라하의 봄'
  • 김세곤 호남역사연구원장
  • 승인 2020.06.01 09: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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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라하의 봄’은 3가지 스펙트럼이다. 첫째는 1968년에 일어난 자유화 운동, 둘째는 ‘프라하의 봄’ 음악 축제, 셋째는 영화 ‘프라하의 봄’ 이다.

성 바츨라프 기마상 뒤에서 본 바츨라프 광장
성 바츨라프 기마상 뒤에서 본 바츨라프 광장

프라하 바츨라프 광장을 걸었다. 이곳은 카를 4세에 의해 조성되었는데 말(馬) 시장이 섰던 곳이다. 그런데 엄밀히 말하면 광장이라기보다 넓은 대로에 가깝다.

광장 이름은 체코 최초 왕조의 왕 바츨라프(907∼935)에서 유래한 것으로, 그는 기독교를 믿다가 친동생에게 살해된 체코의 수호 성인(聖人)이다. 그래서 그가 순교한 9월 28일은 체코 국경일이다.

광장의 상징은 성 바츨라프 기마상이다. 기마상을 중심으로 4명의 보헤미아 성자들의 동상이 세워져 있고, 좌대엔 체코어로 “체코 땅의 영도자이며 우리의 주군 (主君) 성 바츨라프여, 우리와 우리의 후손들이 사라지지 않도록 하소서!”라고 새겨진 문장이 눈길을 끈다.

얀 팔라흐와 얀 자이츠 기념석
얀 팔라흐와 얀 자이츠 기념석

그런데 성 바츨라프 기마상 아래에는 1968년에 일어난 '프라하의 봄'으로 희생된 대학생 2명의 추모비가 세워져 있다.

1968년 8월21일 소련의 탱크를 앞세운 군대가 바츨라프 광장을 점령했다. 이에 항의하여 1969년 1월 19일에 대학생 얀 팔라흐가, 2월 25일에 얀 자이츠가 분신자살했다.

체코슬로바키아는 노보트니가 1953년부터 14년간 공산 독재를 했다. 그런데 1968년 1월에 두브체크가 당 제1서기가 되면서 상황이 달라졌다. 두브체크는 '인간의 얼굴을 한 사회주의' 노선을 추진했다. 4월에 그는 사전검열제도의 폐지, 언론 및 출판의 자유, 집회의 자유 등 개혁안을 발표했다. 체코 대중은 열광했다. 이후 '프라하의 봄'이라 일컫는 자유화 운동이 일어났다.

이러자 소련의 개혁저지 압력이 거세졌다. 하지만 6월26일에 ‘2천어 선언’이 발표되었다. 이 선언은 소련이 간섭할 경우 저항하겠다는 선언이었다. 7월 중순에 소련, 불가리아 등 5개국은 바르샤바에서 모여 체코의 개혁 추진에 경고했다. 하지만 사태는 더 악화됐다.

8월 20일 밤에 바르샤바조약 군대 20만 명은 소련제 탱크를 앞세워 체코슬로바키아 전역에 진입했다. 8월21일에 소련 탱크는 프라하 바츨라프 광장을 점령했고, 두브체크는 소련으로 납치되었다. 이후 일주일 동안 프라하에서만 수십 명이 살해되었다. 10월 중순에는 바르샤바 조약군의 반(半)영구적 주둔이 확정되었다. 이러자 외국군 철수요구 시위, 학생데모 등이 연이어 발생했다.

하지만 1969년 4월17일에 ‘브레즈네프의 충견(忠犬)’인 후사크는

‘진정한 사회주의’를 실행했고 수십만 명의 지식인들을 숙청했다. 지식인들은 직장에서 쫓겨나 막노동으로 생계를 이어가거나 강제 출국당했다.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영화 ‘프라하의 봄’의 원작)』의 저자 밀란 쿤데라도 1975년에 프랑스로 망명했다.

1989년 11월9일에 베를린 장벽이 붕괴됐다. 8일 후인 11월17일에 프라하 대학생들이 시위했다. 20일에는 시위대가 50만 명으로 늘어났고, 27일에는 노동자들도 총파업하였다. 프라하의 거리는 연일 시위였다.

대통령 궁을 지키는 무장한 군인들
대통령 궁을 지키는 무장한 군인들

12월 초에 공산당은 일당제(一黨制) 폐지를 발표했고, 12월 29일에 극작가겸 시인 바츨라프 하벨(1936∼2011)이 대통령이 되면서 피 한 방울 흘리지 않는 ‘벨벳혁명’이 완성됐다.

하벨은 1968년 ‘프라하의 봄’ 이후 반정부투쟁에 앞장섰고, 1977년에 '인권헌장 77'을 공동기초하여 투옥되었다. 하벨은 1979년에 에세이 ‘힘없는 자들의 힘(The Power of the Powerless)’을 통해 공산정권을 신랄하게 비판하자, 체코 공산당은 그를 1979년 5월부터 1983년 2월까지 투옥했다.

하벨은 1989년부터 13년 간 대통령을 하면서 용서와 화합으로 체코 국민을 하나로 뭉치게 하였다. 이 때문에 하벨을 '동유럽의 만델라'라고 부른다. 그는 퇴임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저에게 실망한 국민, 저의 행동에 전혀 동의하지 않았던 국민, 그리고 저를 미워했던 국민에게 진심으로 사과를 드립니다. 용서하십시오"

하벨은 2004년 서울평화상 수상자로도 우리에게 친숙한데, 북한의 김정일이 사망한 다음 날인 2011년 12월 18일에 별세했다. 2012년에 체코 정부는 프라하 국제공항의 이름을 '바츨라프 하벨' 국제공항으로 바꿨다. 마치 폴란드 바르샤뱌 공항 이름을 ‘쇼팽공항’으로 한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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