옷에 5월의 풀물이 든 날
옷에 5월의 풀물이 든 날
  • 문틈 시인
  • 승인 2020.05.12 15:3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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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 앞에 손바닥만한 공원이 있다. 이 공원이 내게는 유일한 쉼터다. 한가할 때면 자주 공원으로 간다. 공원은 경사가 급하지 않은 오르내리막길로 되어 있다. 눈부시게 빛나던 벚꽃들이 지고, 지금은 공원 바닥에 철쭉들이 한창이다. 라일락도 향기를 내뿜는다.

공원을 한번 거닐고 나오는 데 20분 정도밖에 안 걸린다. 작은 공원이긴 하지만 가을 낙엽이 질 무렵까지는 숲의 푸르름이 내 시야를 점한다. 나무숲에는 뻐꾹새, 묏비둘기, 까치, 그리고 이름을 알지 못한 작은 새들의 노래소리도 들린다. 딱따구리 나무 등걸 쪼는 소리는 집에까지 들린다.

요즘 내가 공원에 가서 자주 발걸음을 멈추는 곳은 풀밭이다. 평평한 노지같은 풀밭에는 갖가지 꽃들이 피어 있다. 주로 풀꽃들이다. 보라색, 노란색, 하얀색, 붉은색…. 화려한 색깔들로 단장한 작은 꽃들이 풀밭 여기저기 피어 있다.

꽃무늬를 새긴 넓은 주단을 활짝 펴놓은 듯한 풀밭에 앉아서 나는 풀밭을 둘러본다. 볼수록 아름답다. 오래 들여다보고 있자니 나는 날으는 담요를 타고 어느새 다른 세상에 와 있는 느낌이다. 꽃들이 저마다 다른 모양과 크기와 색깔과 잎새로 화려하게 차려 입은 모습이라니. 흡사 파티에 초대받아 한껏 맵시를 부리고 나온 모습들이다.

보자 하니 풀밭 위에 나비가 날고 있는 것이 눈에 띈다. 나비는 이 꽃에서 저 꽃으로 날아다닌다. 저 연약하고 가벼운 날개를 단 가녀린 나비가 풀밭 위에서 희미한 존재감을 펄럭인다. 아름다운 정경이다. 무심코 나비가 날아가는 행로를 눈길이 따라간다.

나비는 마치 바람에 흩날리는 듯 날아다닌다. 팔랑, 팔랑, 나는 모양만 봐서는 어디로 날아갈지 짐작할 수 없다. 나비는 꽃에 잠깐 앉았다가는 금방 다시 날아가고 다른 꽃에 앉았다가는 또 금세 날아가고, 풀밭을 날아다닌다.

언뜻 보기에 이 꽃 저 꽃들에게 무엇인가를 묻고 다니는 것 같다. 아니다, 무엇인가를 급하게 전하고 다니는 것 같다. 그들끼리만 통하는 무엇인가를 묻고, 전하고…. 그러느라고 나비는 계속 꽃들을 찾아다니는 것 같다.

나는 나비가 날아다니는 모습을 계속 눈길을 떼지 않고 지켜본다. 그러는 중에 갑자기 다른 나비 한 마리가 어디선가 날아오더니 내가 지켜보는 나비 가까이 날아와 서로 붙을 듯 떨어질 듯 한 쌍으로 짝지어서 곧바로 나비 두 마리는 공중으로 사라진다.

나비가 날아간 풀밭은 5월 오후의 햇빛을 받아 더 찬란해 보인다. 나는 잠시 생각해본다. 나비가 풀밭의 화려한 세상을 날다가 제 짝을 만나 다른 하늘로 날아간 사건이 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풀밭에 일어난 이 일은 아무도 모르는 오늘 나 혼자 목격한 사건이다. 세상에는 사람들이 모르는 아름다운 일이 참 많다.

풀밭은 클로버, 민들레, 꽃잔디, 마가렛, 봄까치꽃 같은 꽃들이 끼리끼리 모여 피어 있다. 민들레는 노란꽃이 지고 수많은 솜털 가닥들이 동그란 공 모양으로 부풀어 있다. 나는 꽃대궁이를 꺾어들고 수많은 깃털들이 하나씩의 씨앗을 싸맨 채 서로 얽혀 있는 모습을 보고 찬탄을 발한다. 마치 대단한 공력과 기술과 지혜를 짜서 만들어낸 첨단 공예품처럼 보인다.

깃털꽃 대궁이를 꺾어 공중에 쳐들고 훅 입김을 뿜어내자 깃털씨들은 산지사방으로 흩어져 둥둥 떠간다. 각자 어디로 갈지는 모른다. 우연. 우연이 어딘가에 낙하해 내년 봄에 싹을 내밀고 꽃을 피우리라.

이 꽃 한 송이의 정교한 얽힘, 낙하선처럼 씨 하나씩을 매달고 곳곳으로 날아가는 모양에 나는 말을 잃는다. 내 앞에 펼쳐진 이 경이로운 모습이 자연선택과 돌연변이에 의해 저절로 생겨났다는 이야기를 나는 믿어야 할까. 문득, 저절로 생겨난 것은 이 천지간에 아무것도 없다는 것이 진실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나를 엄습한다.

나는 클로버가 무더기로 피어 있는 저쪽으로 가서 네 잎 클로버를 찾아본다. 클로버는 세 개의 잎이 정상이라고 하는 말을 들은 것 같다. 토양 성분에 따라서 네 잎 클로버가 생겨난다던가. 풀밭의 꽃들은 제가끔 자기에게 알맞은 그런 모양과 그런 색깔을 가지고 저기 피어 있다.

아름다워라, 5월이여. 거기까지 생각하고는 5월의 푸른 풀밭을 지나가는 부드러운 바람을 손바닥을 펴서 느껴 보고는 나는 아무 생각도 하지 않기로 했다. 그냥 이대로 나는 행복감을 느낀다.

파랗고 또 파란 빛을 대지에 망토처럼 입혀준 5월이 은혜로울 뿐. 풀밭에서 일어나 보니 내 앉은 자리 옷에는 풀물이 들었다. 시방 내 마음은 그지없이 푸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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