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시 향 머금은 번안시조(172) 절구(絶句)
한시 향 머금은 번안시조(172) 절구(絶句)
  • 장희구 시조시인/문학평론가
  • 승인 2020.05.11 10:40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솔바람 가락이 악보 밖의 곳을 연주하고 있는데

자연은 온통 시심을 던져 주었다. 물소리며 새소리까지도 자연에서 나온 소리는 노래요 곡조였다. 시심이 풍부한 사람들은 시를 읊었고, 가락을 즐기는 사람들은 장단을 곁들어 가면서 길고 완만하게 악보 없는 연주로 한 마당을 펼치기도 했다. 달빛을 등불로 보고, 산 빛은 초대하지 않는 손님이라는 시상은 그대로 한 줄기 시심이다. 솔바람 가락이 악보 밖을 연주하고 있으니 다만 보배로만 여길 뿐 남에게는 전할 수가 없다고 읊었던 시 한 수를 번안해 본다.

絶句(절구) / 최항

뜰에 가득 달빛은 연기 없는 등불이요

자리에 산 빛은 청하지 않은 손님인데

솔바람 가락 연주를 전할 수가 없다네.

滿庭月色無烟燭   入座山光不速賓

만정월색무연촉   입좌산광불속빈

更有松絃彈譜外   只堪珍重未傳人

갱유송현탄보외   지감진중미전인

솔바람 가락이 악보 밖의 곡을 연주하고 있네(絶句)로 제목을 붙여본 칠언절구다. 작가는 내융(內融) 최항(崔沆:?~1024)이다. 위 한시 원문을 의역하면 [뜨락에는 가득한 달빛 연기 없는 등불이요 / 자리에 드는 산 빛은 청하지 않았던 손님이네 // 솔바람 가락이 악보 밖을 연주하고 있으니 / 다만 보배로만 여길 뿐 다른 사람에게는 전할 수가 없다네]라는 시심이다.

위 시제는 [절구 한 수를 지으면서]로 번역된다. 뜨락에 손님 한 분이 성큼성큼 다가선다. 엉덩이를 쏘옥 내밀며 다가선 환한 달빛이다. 뜨락에 흥건하게 고여 있는 은은한 달빛 여울을 따라 산 빛이 성큼성큼 다가선다. 이 틈새를 놓치지 않고 솔바람이 악보에도 없는 노래를 즐겁게 연주하니 시인이 황홀경에 빠졌다. 전해 줄 사람도 없었겠지만 전할 수가 없다는 안타까움이다. 시인은 이런 연주의 장면 장면을 한 순간 한 자리도 놓치지 않고 주섬주섬 모아 본다. 뜨락이나 지붕에 가득한 달빛은 연기 없는 등불이요, 슬그머니 자리에 드는 산 빛은 미쳐 청하지도 않았던 손님이었다는 시상이다. 달이 뜨는 밤이면 언제나 흔히 볼 수 있는 장면이지만 시인은 이를 자연의 대향연이라고 생각했을 것 같다. 화자는 이런 향연과 같은 장면을 놓치면 안 되겠다는 소신에 찬 나머지 바람 소리와 함께 ‘쏴아’ 울리는 솔바람 소리라는 향연의 연주 장면으로 보았다. 솔바람 가락이 악보 밖을 연주하고 있으니, 이것을 다만 보배로만 여길 뿐 다른 사람에게는 전할 수가 없다는 시상을 일으켰다. 착상의 미적인 멋을 부렸다.

위 감상적 평설에서 보였던 시상은, '달빛 연기 등불이요, 산 빛 가득 손님이네, 솔바람이 악보 밖 연주 사람에게 전하지 않고'라는 시인의 상상력을 통해서 요약문을 유추한다.

장희구 시조시인/문학평론가
장희구 시조시인/문학평론가

==================

작가는 최항(崔沆:?~1024)으로 고려 후기의 문신이자 승려다. 고려 시대 무신 정권기의 집권자다. 최우의 아들로 아버지의 뒤를 이어 집권한 후, 좌우위상호군·호부상서·중서령감수국사 등을 두루 지냈다. 무고를 믿어 계모 대씨를 독살하고 많은 중신들을 죽였으며, 몽고에는 강경정책을 썼다.

【한자와 어구】

滿庭: 뜨락. 月色: 달빛. 無烟燭: 연기없는 촛(등)불. 入座: 자리에 들다. 山光: 산빛. 不速賓: 초대하지 않은 손님. 불청객. // 更: 곧 문득. 有: ~있다. 松絃: 소나무 가지가 들려준 가락. 彈譜外: 악보로 옮길 수 없는 가락. 只堪: 다만 ~이라 여기다. 珍重: 보배롭고 귀하다. 未傳人: 전하지 못하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