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패는 망국의 지름길 - 25회 정약용, 형 정약전에게 “나라가 썩은 지 오래”라고 편지를 보내다
부패는 망국의 지름길 - 25회 정약용, 형 정약전에게 “나라가 썩은 지 오래”라고 편지를 보내다
  • 김세곤 호남역사연구원장
  • 승인 2020.03.02 09:1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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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01년 신유박해로 경상도 장기로 유배 간 정약용은 황사영 백서 사건이 일어나자, 10월20일에 장기에서 압송되어 27일에 한양 감옥에 갇혔다.

실학 박물관 (경기도 남양주시 다산 생가)
실학 박물관 (경기도 남양주시 다산 생가)

다행히도 11월5일에 혐의없음이 드러나자, 이번에는 유배지가 바뀌어 전라도 강진으로 내려갔다.
전라도 신지도에서 유배를 살았던 둘째 형 정약전(1758∼1816)도 신안 흑산도로 유배지가 바뀌었다.

서울에서 형 정약전과 함께 유배지로 내려간 정약용은 11월21일에 나주 반남정에서 하룻밤을 같이 자고 11월22일에 두 사람은 헤어졌다.
이후 정약용은 1805년부터 1816년까지 11년간 정약전과 편지를 주고받았다. 1)
정약용은 1810년경에 흑산도에 유배 중인 정약전에게 보낸 편지에서 “천하는 썩어버린 지 이미 오래입니다”라고 했다.

이 편지에는 요순시대의 정치가 가장 모범인 것은 고적제 즉 인사고과제도에 있음을 토로했다.
그러면 형 정약전에게 보낸 편지를 읽어보자.

“최근 몇 년 사이에 저는 요순시대의 나라 다스리던 법을 깨달았습니다. 후세와 비교해 보면 훨씬 엄혹(嚴酷)하고 빈틈없이 짜여져 물을 부어도 새지 않을 정도입니다.
요즘 사람들은 요순의 정치는 순박하고 태평하여 천하가 저절로 조화된 경지에 이르렀다고 인식하고 있는데 이는 결코 있을 수 없는 이치로서 매우 어리석은 견해라 하겠습니다.
(중략) 공자(孔子)께서 항상 말씀하시길, ‘요순시대는 희희호호(熙熙皥皥)하였다.’라고 하였습니다.
즘 사람들은 이것을 순박하고 태평스럽다 뜻으로 인식하고 있는데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희희(熙熙)는 ‘밝다’는 뜻이고 호호(皥皥)는 ‘희다’는 뜻이니, ‘희희 호호’라고 하는 것은 모든 일이 다 사리(事理)에 의해 잘 다스려져 밝고 환하여 티끌 하나 터럭 하나라도 악(惡)을 숨기고 더러움을 감출 길이 없다는 뜻입니다. 요즘 세속에서 말하는 ‘밤이 낮 같은 세상'이란 것이 바로 요순시대를 말하는 것입니다.

요순시대가 그렇게 되어진 까닭을 살펴보건대, 그것은 오직 고적(考績 인사고과)제도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 당시의 고적제도는 요즘 세상의 여덟 글자로 된 제목(題目)만 있는 고적 제도처럼 소루(疏漏)하거나 조략(粗略:엉성함)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반드시 본인으로 하여금 직접 임금 앞에 와서 얼굴을 맞대고 자기 입으로 말을 하게 하였으니 잘못한 것을 거짓으로 꾸밀래야 꾸밀 수 없게 하였던 것입니다. ”

이어서 편지는 순임금에게 신하들인 우(禹), 고요(皐陶), 익(益), 직(稷)이 자기의 치적을 거짓 없이 아뢰는 모습을 편지에 적는다. 3)

“무릇 전(典)이란 나라를 통치하는 법이요, 모(謨)란 나라를 다스리는 정책입니다. 그 법과 정책은 고적제도 보다 더 나은 게 없으니, 이것이 바로 요순(堯舜)의 정치를 이룩할 수 있었던 이유였습니다.
요즘 사람들은 ‘순임금께서는 그냥 옷소매를 드리우고 팔짱을 낀 채 눈을 감고 진흙으로 빚은 사람처럼 점잖이 앉아 있었는데도 천하가 자연히 태평해졌다.’고 하는데, 이것은 헛된 꿈을 꾸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천하는 썩어 버린 지 이미 오래입니다. 요즈음 관리를 포폄(褒貶 포상과 징계)하는 제목(題目)에 적혀 있길 ‘이욕의 생각이 없고 편안하고 단아하게 정치를 하여 다스림으로 온 경내가 평온하다.’라고 했는데 이러한 사람을 순 임금의 어전에 올라가 스스로 자신의 공적을 아뢰도록 한다면 이 사람이 무슨 일을 했다고 아뢸 수 있겠습니까?”
(중략)

이렇게 모든 것을 종합해 보면, 요순시대 통치와 정책의 근간은 고적을 떠나서는 말 할 수 없습니다. 얼굴을 마주 대하고 직접 진달하는 것이 가장 좋은 고적법이요, 차선책으로는 스스로 자신의 공적 사항을 기록하여 아뢰도록 하는 것입니다.

오늘날처럼 더러운 세상에서는 만약 스스로 자신의 공적을 아뢰도록 하는 법을 시행케 한다면, 고을의 수령(守令) 된 자들은 온갖 방법을 다 동원하여 자기의 책임을 다한 것처럼 꾸미려고, 하지도 않는 일들을 만들어 자기의 공적 사항을 뚜렷하게 꾸미려는 사람이 있을 것입니다.
우리 백성들이 도탄(塗炭)에 빠지는 것이 어찌 이 정도로까지 심하기야 하겠습니까. 오호, 슬프기만 합니다. 그 누가 있어 백성을 위해 이 막된 세상의 참모습을 아뢴단 말입니까?”

가장 이상적인 정치를 했다는 요순시대도 그냥 요순이 가만히 앉아 있어서 되는 것이 아니었다. 철저한 인사고과제도 때문이었다.

1) 다산이 정약전에게 보낸 편지는 <다산시문집(한국고전번역원 홈페이지)>에 17통이 실려있고, 박석무의 저서 <유배지에서 보낸 편지>에도 13통이 번역되어 있다.
2)정약전은 1790년 증광문과에 응시, 병과로 급제하였다. 이후 전적·병조좌랑을 역임하였다.
3) 이 내용은 <서경> ’익직‘편에 나온다.

김세곤 (호남역사연구원장, 청렴연수원 청렴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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