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패는 망국의 지름길 - 20회 다산 정약용, ‘오누이’ 시를 짓다
부패는 망국의 지름길 - 20회 다산 정약용, ‘오누이’ 시를 짓다
  • 김세곤 (호남역사연구원장, 청렴연수원 청렴강사
  • 승인 2020.01.20 10:51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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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산 기념관 (강진군 소재)

‘오누이(有兒)’는 1809년부터 1810년까지 2년 내리 흉년이 들어 남편은 아내를 버리고, 어머니는 자식을 버린 것을 안타깝게 여겨 지은 시이다. 일곱 살 난 계집아이가 자기 동생을 데리고 길거리를 방황하면서 엄마를 잃어버렸다고 엉엉 울고 있었다.

시를 읽어보자

오누리 둘이서 나란히 걸어가네      有兒雙行
누이는 묶은 머리, 동생은 쌍상투     一角一羈

누이는 이제 겨우 말 배우고            角者學語
묶은 머리 동생은 머리만 더벅더벅    羈者髫垂

어미 잃고 울면서                   失母而號
갈림길에서 헤매이네.              于彼叉岐

애들을 붙들고 까닭을 물었더니     執而問故
목이 메어 더듬는 말이                嗚咽言遲

“ 아버지는 집 떠나고               曰父旣流
 어머니는 짝 잃은 새가 되었는데    母如羈雌

쌀독이 바닥나서                甁之旣罄
사흘을 굶었네요.                三日不炊

엄마하고 나하고 흐느껴 울어     母與我泣
눈물 콧물 구 빰에 얼룩졌네요.    涕泗交頤

동생은 젖 달라고 울지만          兒啼索乳
엄마 젖은 이미 말라붙었지요.    乳則枯萎

우리 엄마 내 손을 잡고          母携我手
젖먹이 저 애와 함께              及此乳兒

저기 저 산촌 마을 돌아다니며   適彼山村
구걸해서 우리를 먹었다오.       丐而飼之

어촌 장에 이르러서는          携至水市
엿도 사서 먹였는데             啖我以飴
 
길 너머로 데려와서                         携至道越
어미 사슴 새끼 품듯 껴안고 재워서     抱兒如麛

아이는 포근히 잠이 들고           兒旣睡熟
나도 죽은 듯 잠들었는데          我亦如尸

잠이 깨어 이리저리 살펴보니    旣覺而視
어머닌 여기에 없었답니다.”      母不在斯

이렇게 말하다가 또 울다가     且言且哭
눈물 콧물이 범벅이네           涕泗漣洏

해 지고 어두워지면            日暮天黑
뭇 새들도 자기 집 찾건만.    栖鳥群蜚

떠도는 두 남매             二兒伶俜
찾아갈 집이 없네.         無門可闚

불쌍하다. 이 백성들         哀此下民
천륜마저 다 잃었구나.      喪其天彝

부부 사이 서로 사랑하지 못하고   伉儷不愛
어미도 제 자식 돌보지 못하네.     慈母不慈

옛날 내가 암행하던           昔我持斧
그 해가 갑인년이었는데     歲在甲寅

정조 임금은 1794년(갑인년) 10월28일에 정약용을 암행어사로 임명하여.
경기북부 지역 4개 고을을 암행하도록 했다. 그 지역은 적성(파주시), 연천(연천군), 삭녕 · 마전(두 곳은 북한지역)이었다. 정약용은 곧바로 현장에 가서 샅샅이 민정을 살피고 11월15일에 정조에게 복명했다.

그는 적성 현감 이세윤과 마전군수 남이범이 선정을 베풀었다고 복명하면서, 연천 전 현감 김양직과 삭녕 전 군수 강명길의 탐학스런 행위를 고발했다. 김양직은 궁중의 어의(御醫)로 권세가 막강했고, 강명길은 임금 가족 묏자리를 잡는 지관(地官)으로 왕실과의 끈을 이용해 토색질을 했다. 하지만 그간 암행어사의 처벌 요구가 있었지만 대신들이 가로막고 이들을 옹호했다. 다산은 이들을 처벌하라고 강력하게 정조에게 보고했다. (박석무, 다산 정약용 유배지에서 만나다.한길사, 2003, P 173-180)

임금님 당부가 고아들을 보살펴    王眷遺孤
고생 없이 하라고 부탁했건만       毋俾殿屎

모든 목민관들은                      凡在司牧
감히 그 분부 어기지 말아야지     毋敢有違

흉년에 부모에게 버림받은 아이들. 안타깝게도, 흉년에는 천륜도 인륜도 다 무시된다.   

그런데 『전간기사』 6수에는 에피소드가 있다. 아들로부터 시를 얻어 읽어본 이백진이 경상도 김해에서 귀양 사는 사촌 아우 이학규에게 편지와 함께 시를 필사하여 보냈다. 이백진은 편지에서 “정약용은 당대의 사백이다. 그의 시에는 사람을 깨우치는 뜻이 있다. 두보의 수노별(垂老别 병사로 나가는 노인의 할멈과의 이별)· 무가별(無家别 가족도 없는 고향과의 이별) 이후 이런 시는 없었다.”고 썼다. 다산 시를 읽고 감동을 받은 이학규는 1810년에 『己庚紀事(기경기사)』를 완성했다. 이학규는 정약용과 가까이 지내던 후배로 그 역시 정약용과 마찬가지로 1801년 신유옥사에 연루되어 유배생활을 하고 있었다. (박석무, 다산 정약용 평전, 민음사, 2014, p 4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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