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이 오늘이소서
오늘이 오늘이소서
  • 문틈 시인
  • 승인 2020.01.02 15: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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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해를 축하한다. 가족과 지인들은 물론 내가 알지 못하는 이 땅의 모든 사람들에게 새해 강복을 빈다. 사람들에게만 아니라 이 땅의 짐승들, 새들, 나무들, 산들, 강들에게도 새해를 축하한다. 늘 평안하시라. 늘 건강하시라. 정녕 그런 마음이다.

밝아오는 새해를 축하하는 마음을 새해 일년내내 간직하고 있기를 내 스스로에게 다짐한다. 어릴 적 새해를 기다리면서 그날이 오면 어제와는 전혀 다른 첫날이 되는 줄로 알고 가슴이 설레었다. 그날은 세상이 온통 파란 유리로 내다보는 것처럼 보통날과는 다른 날로 올 줄 알았다.

새해 첫날 아침 나는 창문을 열고 조심스레 밖을 내다보았다. 어제와 똑같은 날이었다. 길들도, 산들도, 집들도 어제와 같은 자리에 그 모습 그대로 있었다. 저으기 실망했다. 마치 무엇에 속은 것 같은 마음이었다. 선물을 받고나서 봉지를 뜯어보니 아무 것도 없는 것 같은.

그런데 반전이 있다. 나이가 들어서 새해를 맞이할 때마다 나는 어제와 똑같은 날들이지만 선물을 받은 것 같은 기분이 된다. 새해를 스스로 축하하는 마음이 된다. 그러기에 나의 축하인사는 진짜 마음이다. 또 한해 하늘과 별들과 산들과 나무들과 사람들을 보는 것이 얼마나 대단한 축복인가를 알게 되었다. 날마다 사는 것이 은총의 하루다.

하루하루가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귀하디 귀한 진짜배기 시간들이다. 내가 살아 있다는 것, 내가 맛있는 것을 먹는다는 것, 아는 지인을 만나 차 한 잔의 담소를 나눈다는 것, 내가 팔다리를 휘둘러 거리를 오고 간다는 것, 그리고 하늘의 별들과 새들과 바람과 비와 눈, 이 모든 것들이 마치 나 하나를 축복하기 위해 마련된 아름다운 장식품 같은 기분이 드는 것이다.

내가 아무리 권세가 있은들 이 모든 축복의 장식들을 어디서 구하기나 할 것인가. 저절로 공으로 내게 온 이 모든 것들에게 나는 축하인사를 하지 않을 수 없다. 이 모든 것들에게 엎드려 절하고 싶다.

그야말로 오늘이 오늘이소서이다. 옛날 고려 말부터 조선 중기까지 이 땅의 사람들이 불렀다는 노래, 김천택이 1782년 우리나라 노래집이라는 뜻의 제목을 달고 580수의 가곡 가사를 정리한 ‘청구영언’의 첫노래가 바로 ‘오늘이 오늘이소서’다.

전북 남원에서 채보되어 오늘까지 전승되고 있는 사연이 있는 노래다. 조선시대 임진왜란, 정유재란 중에 남원에서 납치되어 일본으로 끌려간 수많은 도기장들이 타국에서 400여 년간 이 노래를 부르며 그리움의 한을 달랬다고 한다.

마치 일제치하에서 징용으로 끌려가 남방의 섬에서 아리랑을 부르며 눈물을 닦았던 이 나라 청년들처럼. 노래가사는 ‘오늘이 오늘이소서 /매일이 오늘이소서/저물지도 새지도 말으시고/새거든 늘 언제나 오늘이소서/오늘이 오늘이소서’다.

많은 사람들이 이 노래를 태평성대의 날인 오늘의 평안이 날마다 이어지기를 바라는 뜻으로 해석하는데, 나는 조금 달리 읽는다. 하루하루 살아가기 어려운 시대, 무사히 오늘 하루를 마친 사람들이 내일도 오늘처럼 무사히 마치는 날이 되기를 바라는 사람들의 바람이 아니었을까 하고.

추석명절에 오곡백과를 추수하고 난 ‘더도 덜도 말고 오늘같은 날’로 표현하는 것과는 속내가 다른 뜻으로서 오늘이 오늘이소서 했다고 보는 것이다. 그만큼 하루를 보내기가 힘들고 고달팠음을 행간에서 살펴보는 것이다.

오늘은 온(come)날(day)이다. 온날 즉 오늘은 어제도 아니고 내일도 아니다. 지금 여기 와 있는 이 순간, 이 시간이다. 지나가버린 날도 아니고, 아직 오지 않은 내일도 아니다. 오늘을 긍정하고 늘 오늘같은 그날의 족함을 바란 옛 선조들의 소망은 바로 오늘 우리들의 그것이기도 하다.

오늘을 긍정하고 선물로 받아들이면 고달픈 인생살이가 축복으로 변한다. 새해 모든 날들이 ‘오늘이소서’로 살 수 있다면 더 바랄 것이 없다. 나라가 뒤숭숭하고, 살림은 펴지질 않고, 일은 뜻대로 되지 않으며, 일자리는 없고, 아이들의 울음소리가 들리지 않으며, 집값은 다락같이 오르고.

아, 무엇을 어떻게 해야 좋을지 모른다고 해도 달리 생각하면 우리는 그날그날 제비를 뽑은 사람들이다. 인생에 몇 백만 대 일로 당첨된 사람들이다. 그러므로 어느 하루인들 축복이 아닐 수 없다.

인생이란 얼마나 슬프고 괴롭고 고단한 것인가를 생각할 때마다 하루하루 살아있음에 감사하지 않을 수 없다. 매일매일 오늘을 무사히 마치듯 그런 오늘이 삼백육십오일 계속되었으면 하고 바라는 뜻에서 새해를 맞이하는 모든 이땅의 사람들과 삼라만상에게 축복의 인사를 전한다.

옛사람들의 절절한 바람대로 오늘이 오늘이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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