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항쟁의 올바른 평가와 여∙순항쟁의 남은 과제
4∙3항쟁의 올바른 평가와 여∙순항쟁의 남은 과제
  • 이승훈(논설위원/정치학박사)
  • 승인 2019.12.19 16: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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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훈(논설위원/정치학박사)

필자는 지난 4월 3일, 제주4.3평화공원에서 거행된 ‘제71주년 4.3희생자 추념식’에 참석한 소회(所懷)를 본지에 밝힌 바 있다.
행사 도중, 서울에서 온 여고생의 추념사를 들었을 때 뭉클하고 울컥했던 기억이 지금도 뇌리에 오롯이 남아 있다. 오늘 4.3을 다시 언급하는 것은 그동안 군사정권과 이를 계승한 정권에서 4.3을 정부 수립에 반대한 폭동으로 매도하고 좌우대립의 소요사태 등으로 규정한 대목이다. 

이로인해 교과서 편찬 때마다 4.3을 왜곡, 폄하하는 등 우리 현대사의 큰 상흔으로 남아있던 이 아픔을 치유하기는커녕 방치하고 학생들에게는 그릇되게 가르쳐 왔던 게 사실이다.
그러나 정부가 바뀌고 이에 대한 연구가 활발히 진행되면서 교과서에서 제주4.3사건을 그동안 ‘폭동’ 등으로 기재돼 오던 문제가 해소될 수 있게 되었다.
엊그제(12월18일자) 신문을 보면 제주특별자치도교육청은 내년 학교 현장에서 사용될 ‘2020 고등학교 한국사 교과서’에 제주교육청이 용역을 통해 마련한 ‘4.3 집필기준’이 최종적으로 반영됐음을 보도하고 있다.

이에 따라 내년 3월부터 사용될 ‘중학교 역사 및 고등학교 한국사 집필기준 개정 시안’에 제주4.3이 ‘8.15 광복과 통일정부 수립을 위한 노력’의 필수 요소에 반영되었다. 올해 11월 27일에는 검인정 국가교과서 검정으로 완료됐다는 반가운 소식도 전해졌다.
돌이켜보면 4.3항쟁의 원인은 단선(1948년 5월, 남한만의 총선)과 단정(미군정과 이승만 일파들이 주장한 단독정부)을 반대한 제주도민들이 불의한 국가권력에 온 몸으로 맞선 민중항쟁이었던 것이다. 이 과정에서 미군정청의 경찰(고위직 대부분은 친일경찰들로 독립운동을 탄압하고 이들을 체포하는데 혈안이 된 민족반역자들임)과 조선경비대, 서북청년단들이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무고한 도민 약 3만명을 학살한 천인공로할 만행이었다. 2차 대전 당시 나치의 유대인 학살에 버금가는 홀로코스트(holocaust)와 다를 바 없다. 

때늦은 감이 없지 않지만 금년은 ‘3.1 독립운동과 임시정부 수립, 그리고 의열단 창단 100주년’을 맞는 뜻깊은 해이다. 오늘을 계기로 그동안 굴절되고 오도된 역사를 바로 잡을 수 있는 단초가 마련되어 우리의 미래인 청소년들에게 감춰지고 잘못된 역사를 제대로 인식할 수 있도록 제도적 장치가 만들어진 것을 

다행으로 생각한다.

당시 제주 4.3항쟁은 미군정과 군경에 의해 엄청난 인명이 살상되고 재산피해가 속출하였으며 7년 7개월 동안 제주도가 유린당한 채 도민의 고통이 계속되었지만 오늘의 결과를 보면서 “국민은 언제나 승리하는 것은 아니지만 마지막 승리자는 국민이며 역사는 발전한다”라고 말씀하신 김대중 전 대통령의 생전의 모습이 떠오른다.
이제 여기에 덧붙여서 같은 시대에 우리 전남 동부지역에서 일어난 여순항쟁을 간략히 살펴보고 피해자에 대한 해원과 관련법의 제정으로 유족에 대한 합당한 배상이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을 말하고자 한다.

먼저 여순항쟁은 1948년 10월 19일부터 27일까지 일어난 사건으로, 여수에 주둔하고 있는 14연대 1개 대대에 제주도경비사령부(사령관 감상겸 대령)가 제주도민을 진압하기 위해 제주로의 출동을 명했지만 이에 불응하면서 촉발된 사건이다.
일부 군인들은 ‘제주토벌출동거부병사위원회’를 구성하고 ’동족상잔 결사반대‘, ’미군 즉시철퇴‘를 주장하며 출병을 거부하였던 것이다.

항쟁의 의미를 보면 첫째로, 제14연대 군인의 명령 불복종으로 시작하여 전남동부 6개 지역(여수, 순천, 광양, 구례, 고흥, 보성) 민중의 지지와 합세로 대중적 참여가 이루어졌다. 

둘째는, 권력의 잘못된 명령에 대한 저항과 이승만 권력의 기반이었던 친일파 관리(官吏)와 경찰의 부패와 억압에 대한 민중의 실천적 저항이었다고 할 수 있다. 여순항쟁은 군인들의 제주로의 출동 불복종으로 시작되었지만 여순의 민중이 그들에게 가해지는 공권력의 폭력적 만행에 저항함으로써 확산된 것이다.

이 항쟁은 인근 6개 지역으로 번지면서 엄청난 인명피해(1949년 전라남도 조사에 따르면 약 1만 5천명이 사망했다고 함)와 함께 이승만 정권의 폭압정치가 본격적으로 시작되어 반공법이 만들어지기도 했다.

무고한 양민이 권력의 무분별한 폭력에 희생된 아픈 역사를 치유할 수 있는 길은 여순항쟁특별법을 조속히 제정하는 것이다. 
국가 폭력으로 인해 유명을 달리하신 고인들의 넋을 추모하고 명예를 회복시키는 것이 국가가 의당 해야 할 도리라고 믿는다.
미완으로 남아 있는 아픈 현대사를 언제까지 방치할 것인가를 정치권에 되묻지 않을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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