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시 향 머금은 번안시조(150) 절명시(絶命詩)
한시 향 머금은 번안시조(150) 절명시(絶命詩)
  • 장희구 시조시인/문학평론가
  • 승인 2019.12.03 14:04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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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찍이 나라를 지탱할 작은 공도 없었나니[4]

일찍이 나라를 지탱할 작은 공도 없었나니[4] : 絶命詩 / 매천 황현
행여나 하면서 가슴 조이던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국내외 지사들은 들끓기 시작했다. 목숨을 버리는 사람도 많았다. 그러나 국가의 존립이 위기에 놓여있을 때 한 편의 시문을 남기고 절명하기란 쉬운 일은 아니다. 일본이 을사늑약을 감행하고, 급기야는 한일합방을 체결하는 과정에서 많은 ‘의사’와 ‘열사’들이 몸을 바쳤다. 충忠을 이루지 못하고 죽는 것에 대한 자기 한탄을 표현하면서 절명시 한 편을 남기고 몸 바쳤던 선현이 읊었던 그 넷째 수를 번안해 본다.

 

絶命詩(절명시)[4] /  매천 황현

나라를 지탱할 조그마한 공도 없고

인만을 이루었을 진정 충 아닌데도

윤곡을 따른 것일 뿐 당시 진동 밟지 못해.

曾無支厦半椽功    只是成仁不是忠

증무지하반연공      지시성인불시충

止竟僅能追尹殺    當時愧不躡陳東

지경근능추윤살      당시괴불섭진동

 

일찍이 나라를 지탱할 작은 공도 없었나니(絶命詩4)로 제목을 붙여본 절구 4수 네 번째다.  작자는 매천(梅泉) 황현(黃玹:1855∼1910)이다. 위 한시 원문을 번역하면 [일찍이 나라를 지탱할 작은 공도 없었나니 / 단지 인(仁)을 이룰 뿐이요, 충(忠)은 아니었네 // 겨우 능히 윤곡(尹穀)을 따르는 데 그칠 뿐이요 / 당시의 진동(陣東)을 밟지 못해 부끄럽구나]라고 번역된다. 
위 시제는 [절명하면서 남긴 시4]로 번역된다. 자신이 죽는 것은 충(忠)을 다하고자 함이 아니라 인(仁)을 이루기 위한 것이라 하였다. 그러나 적을 탄핵하다가 참형 당한 진동(陳東)을 본받지 못하고 겨우 몽고병사의 침입 때에 자분(自焚)하고 만 윤곡(尹穀)의 뒤나 따를 뿐이라고 통탄했다.
시인에게 남아있는 건 단지 절명의 한숨이 깊이 자리하고 있을 뿐이다. 그래서 겨우 능히 윤곡(尹穀)을 따르는 데 그칠 뿐이요 당시의 진동(陣東)을 밟지 못해 부끄럽다고 했다. 시인은 이제 더 이상의 선택의 여지가 없어 보인다. 1910년 8월 29일을 우리는 경술국치의 일로 기억한다. 이 소식을 접한 후에 시인은 바로 절명을 단행하고 만다. 의절이겠으니.
다시 첫구로 이어지는 시인의 상상력은 [난리를 겪다 보니 백두년이 되었구나 / 몇 번이고 목숨을 끊으려다 이루지 못했었는데 // 오늘날엔 참으로 어찌할 수 없고 보니 / 가물거리는 촛불이 창천(蒼天)에 비치는구나]로 라고 했다. 화자의 절망은 이제 절명을 단행할 수밖에 없었겠는데 여기에서 우리는 우국(憂國)의식의 질 높은 수준을 시로 승화시키는 탁월함을 보게 된다.
위 감상적 평설의 요지는 ‘나라 지탱 공도 없고 인을 이룰뿐 충은 없네, 윤곡을 따를 뿐이요 진동을 밟지 못해’ 라는 상상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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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는[3권 5부 外 참조] 매천(梅泉) 황현(黃玹:1855∼1910)으로 구한말의 시인이자 애국지사다. 왕석보의 아들들인 사각, 사천, 사찬 형제들과도 교유하였다. 이후 20대가 되어서부터 많은 시를 짓기 시작하였다. 호남 일대에서는 일찍부터 시재를 인정받았으나, 스스로 늘 부족함을 느꼈다.

【한자와 어구】
支厦: 나라를 지탱하다. 椽: 서까래. 是成仁不是忠: 인을 이루고 충을 이루지 않는다. 尹殺: 중국 송나라 진사로, 몽골 침입 때 가족이 모두 죽음. // 僅: 겨우. 躡: 밟다. 愧: 부그러워하다. 陳東: 중국 송나라 선비로, 국가의 기강을 세우는 상소를 하고 황제의 노여움을 사서 억울하게 죽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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