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시 향 머금은 번안시조(149) 절명시(絶命詩)
한시 향 머금은 번안시조(149) 절명시(絶命詩)
  • 장희구 시조시인/문학평론가
  • 승인 2019.11.27 14: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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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궁화 온 세상이 이제는 망해 버렸어라[3]

우리 역사에는 의절과 충절이 많았다. 국운이 바람 앞의 등불로 놓여있을 때 의(義)와 충(忠)을 보인 선현의 의연한 뒷모습도 만난다. 전쟁에서 이름 없이 죽어간 젊음을 한 송이 꽃에 비유했고, 행주치마를 입고 돌을 나르다가 죽어간 아낙의 애절한 사연도 눈시울을 적시게 한다. 그 중에서도 가장 애절한 역사가 경술국치가 아닌가 싶다. 지식인으로서의 자의식을 드러내면서 국운이 기울어 합방이라는 치욕을 보고 절명했던 선현이 읊었던 셋째 수를 번안해 본다.


絶命詩(절명시)[3] /  매천 황현

강산도 찡그리고 무궁화도 시드는데

등불 켜고 책 덮어 지난 일 회상하니

세상사 아는 사람노릇 이다지도 어렵네.

鳥獸哀鳴海岳嚬        槿花世界已沈淪

조수애명해악빈       근화세계이침륜

秋燈掩卷懷千古        難作人間識字人

추등엄권회천고       난작인간식자인


무궁화 온 세상이 이제는 망해 버렸어라(絶命詩)로 제목을 붙여본 절구 4수 세 번째다. 작자는 매천(梅泉) 황현(黃玹:1855∼1910)이다. 위 한시 원문을 번역하면 [새나 짐승도 슬피 울고 강산도 상을 찡그리네 / 무궁화 온 세상이 이젠 망해 버렸어라 // 가을 등불 아래 책을 덮고 지난 날을 생각하니 / 인간 세상에 글 아는 사람 노릇하기 어렵기만 하구나]라고 번역된다.
위 시제는 [절명하면서 남긴 절구 시3]로 번역된다. 일본침탈 근성은 1905년 을사보호늑약으로 본색을 드러내더니만 급기야는 1910년 한일합방이란 올가미 속에 주권을 빼앗아 버렸다. 매천은 이런 질곡의 시절에 살았고 가슴에 품은 울분을 터뜨리지 못해 스스로 자결할 수 밖에 없었으리.
어디 울분을 참지 못해 죽어간 선현들이 시인뿐이었던가. 수많은 지식인들은 자기의 뜻을 표현할 방법이 없기 때문에 극단적인 행동으로 그 의기를 표현했다. 가을 등불 아래 책을 덮고 지난날을 생각해 보니 인간 세상에 글 아는 사람 노릇하기 어렵기만 하구나라고 했다.
화자는 산천의 새와 짐승도 구슬프게 울고, 나라의 꽃인 무궁화도 벚꽃에 짓눌려 시든다고 했으니 절필(絶筆)의 변인가 했더니 절명(絶命)에 숙연해 진다. 후구로 이어지는 시인의 상상력은 [일찍이 나라를 지탱할 조그마한 공도 없었으니 / 단지 인(仁)을 이룰 뿐이요, 충(忠)은 아닌 것이로다 // 겨우 능히 윤곡(尹穀)을 따르는 데 그칠 뿐이요 / 당시의 진동(陣東)을 밟지 못하는 것이 부끄럽구나]라고 했다. 지식인으로서의 한없는 자책과 부끄러움을 드러낸다.
위 감상적 평설의 요지는 ‘새도 울고 강산 찡긋 무궁화도 망했어라, 책을 덮고 생각하니 선비 노릇 어렵구나’ 라는 상상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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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는[3권 5부 外 참조] 매천(梅泉) 황현(黃玹:1855∼1910)으로 구한말의 시인, 애국지사이다. 어려서부터 총명함이 남달랐고, 11세가 되는 해에 서당에서 천사 왕석보(王錫輔;1816∼1868)를 스승으로 하여 시와 문을 본격적으로 배우기 시작하여 대시인으로 성장할 기틀을 다졌다고 알려진다.

【한자와 어구】
鳥獸哀鳴: 새나 짐승, 海岳嚬: 강산도 찡그리다. 槿花: 무궁화. 여기서 ‘槿花世界(근화세계)’란 대체적으로 우리나라를 일컬음, 已: 이미. 沈淪: 침몰. 몰락. // 秋燈: 가을 등불, 掩卷: 책을 덮다. 懷千古: 천년을 생각하다. 지난 날을 회상. 難作人間: 인간노릇하기 참 어렵다. 識字人: 글 아는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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