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패는 망국의 지름길 - 13회 정약용, 1808년 봄부터 다산초당에서 기거하다.
부패는 망국의 지름길 - 13회 정약용, 1808년 봄부터 다산초당에서 기거하다.
  • 김세곤 (호남역사연구원장, 청렴연수원 청렴강사)
  • 승인 2019.11.25 09: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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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진 백련사에서 능선 하나를 넘으면 다산(茶山)이라는 작은 산이 있다. 야생차가 자라는 산이라 하여 다산(茶山)이라고 했는데, 정식 명칭은 만덕산(萬德山)이고 높이가 412미터이다. 이 산 밑에는 귤동(橘洞)마을이 있다. 가을이면 유자가 노랗게 익어가는 마을이라서 붙여진 이름인데 귤동은 해남윤씨 집성촌이었다. 여기엔 윤단(1744∽1821)의 초당인 다산초당이 있었다.

다산 초당 (출처 : 강진군청 홈페이지)

1808년 3월16일에 정약용은 다산초당에서 놀았다. 7언 율시 두수가 전해진다. 시의 제목부터 살펴보자.  

삼월 십육일 윤문거의 다산서옥(茶山書屋)에서 놀았는데 공윤도 병을 치료하며 거기에 있었다. 어찌 하다 보니 열흘이 넘게 그곳에서 묵고 있었는데 점차 이렇게 일생을 마쳤으면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하여 이 두 수를 읊어 공윤에게 보였다.

윤문거는 귤림처사 윤단의 큰 아들 윤규노(1769∽1837)이다. 윤단은 다산의 외가인 해남 윤씨로 행당 윤복(1512∽1577)의 후손이다. 윤효정의 아들인 윤복은 안동 대도호부사 시절에 퇴계 이황(1501∽1570)과 교류했다. 정약용은 다산초당을 다산서옥이라고 칭했다. 아마도 초당에 책들이 있었나 보다.

한편 공윤은 자화상으로 유명한 공재 윤두서(1668∽1715)가 고조부인 윤종하이다. 다산의 외증조부가 공재이니 정약용과 윤종하는 친척 간이었다.
다산이 쓴 ‘또 공윤에게 주다[又贈公潤]’ 시의 첫 머리에 나온다.

나로서는 증외조부가
그대로선 바로 고조부이시지

그러면 정약용이 1808년 3월16일에 지은 시를 읽어보자.

1수

사는 곳 일정치 않게 안개 노을 따라다니는 몸 
더구나 다산이야 골짜기 마다 차나무로다.    
하늘 멀리 바닷가 섬엔 수시로 돛이 뜨고    
봄이 깊은 담장 안에는 여기저기 꽃이로세.  

싱싱한 새우무침 병 앓는 자 입에 맞고     
연못과 누각 초라해도 이만하면 살만하지    
흡족한 마음에도 근심은 있지만 내 분수엔 넘치니   
여기서 노닐며 서울 사람에게는 자랑하지 않으리. 
 
2수

숲이 짙고 산이 깊어 몸놀림이 느긋하고  
조용하게 감상하는 맛 떠드는 곳에 댈 것인가
조수는 봄빛처럼 왔다가는 다시 가고    
꽃은 나라 권세같이 성했다가 곧 시들지. 

송시(宋詩)를 슬슬 보며 골라볼까 생각하고  
조용히 주역 들고 이 마음 의탁한다네. 
단 한 가지 두고두고 서글프게 만든 것은 
연못에 가득 푸르게 연을 심지 않은 것이네.

정약용은 다산초당(茶山草堂)에서 열흘 넘게 윤종하와 함께 묵었다. 그동안 다산은 동문 밖 주막집과 보은 산방 그리고 제자 이청의 집을 전전하던 터라 이곳이 너무 좋았던 모양이다.

그래서 윤규노에게 이곳에서 살고 싶다는 뜻을 비치었다. 윤규노는 부친 윤단과 상의하여 정약용에게 초당에서 지내라고 하였다. 그 대신 윤단의 손자들을 가르쳐 달라고 부탁했다. 그래서 그런지 다산이 다산초당에서 가르친 18제자 중에 윤단의 손자가 6명이나 된다.

1808년 4월 초에 정약용은 다산초당으로 거처를 옮겼다. 며칠 안 되어서 정약용은 5언 절구(絶句) 한 수를 지었다.
 
적막한 숲 속의 집이요                     寂歷林中屋
졸졸졸 베개 아래 샘물 소리네            琮琤枕下泉
이틀 사흘 지나고 났더니                  已經三兩日
귀에 익어 잠자는 데 방해가 안 되네.   聽慣不妨眠

샘물 소리도 잠결에 들리는 적막한 숲속의 집. 시중유화(詩中有畵)다.

다산초당으로 옮긴지 20여일 지난 4월20일에 다산의 둘째 아들 학포 정학유(1786∽1855)가 찾아왔다. 큰아들 학연(1783∽1859)은 1802년에 찾아왔지만 학유는 팔 년 만에 처음 온 것이다. 

사월 이십일 학포가 왔다. 8년 만 에 만났다.
[四月二十日學圃至 相別已八周矣]

얼굴 생김새는 내 자식 같은데           眉目如吾子
수염이 자라서 딴사람 같구나.           鬚髥似別人

집안 편지 가지고 왔건만                 家書雖帶至
틀림없는 내 아들인지 잘 모르겠네.    猶未十分眞

둘째 아들 정학유와는 16세 때 헤어져 24세에 만났으니 처음에는 아들인가 알아보기도 어려웠다는 다산의 시는 눈물겹다.

5월11일에 다산은 윤문거와 아들 학유과 함께 용혈로 뱃놀이를 하면서 모처럼 휴식을 즐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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