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패는 망국의 지름길 - 12회 정약용, 혜장선사와 함께 백련사에서 놀다.
부패는 망국의 지름길 - 12회 정약용, 혜장선사와 함께 백련사에서 놀다.
  • 김세곤 (호남역사연구원장, 청렴연수원 청렴강사)
  • 승인 2019.11.18 09: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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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련사 (출처 : 강진군청 홈페이지)

다산 정약용(1762∼1836)은 1801년 11월 하순에 강진에 유배 와서 1818년 여름에 고향인 남양주시 마재 마을로 돌아갔다. 40세에서 57세에 이르는 시기였다. 그는 개인적으로는 불행이었지만 조선의 학문을 위해서는 축복의 시간이었다. 강진 유배 시 다산학단으로 일컬어지는 제자들을 길렀고, 500여권에 이르는 책을 저술했다. 특히 경세유표와 목민심서는 강진에서의 다산의 가장 큰 업적이다. 
 
한편 다산은 1808년 봄에 다산초당으로 거처를 정하기까지 세 번 거처를 옮겼다. 1801년 11월23일경 유배객 정약용을 모른 척한 상태에서 고맙게도 동문 밖 주막집  노파의 배려로 정약용은 주막집 토담 방에서 기거하였고, 그곳이 사의재였다. 1805년 겨울에는 백련사 주지 혜장선사(1772∼1811)의 도움으로 큰 아들과 정학연과 함께 보은산방에서 머물렀다. 다산은 아들 학연이 서울로 올라가자 다시 사의재로 내려가 지냈다.

1806년 가을부터는 제자 이청의 집에서 살았다. 이 시기에 다산은 혜장선사와 자주 어울렸다. 

정약용은 1805년 4월18일에 강진군 도암면 백련사에 나들이 하다가 백련사 주지 혜장선사(1772∼1811)를 처음 만났다. 그는 다산 보다 10살 어린 학승이었다. 혜장은 처음에는 정약용을 알아보지 못하고 한나절 대화를 나누었는데, 늦게야 알아보고 같이 잠을 잤다. 그날 밤 다산과 혜장은 주역을 논했는데 혜장은 다산 앞에서 자기의 실력을 마음껏 발휘하다가 다산의 ‘곤초육수(坤初六數)’에 대한 날카로운 질문을 이기지 못하고 무릎을 꿇고 말았다.

그 뒤로 혜장은 다산을 스승으로 극진히 모시면서 정성을 다했다. 1805년 겨울에 다산이 보은산방으로 거처를 옮기게 된 것도 혜장이 도운 것이다.

다산과 혜장은 자주 어울렸고, 둘 사이의 정은 더욱 깊어만 같다. 다산이 1806년 3월에 지은 시가 이를 말해준다.

“삼경에 비가 내려 나뭇잎 때리더니
숲을 뚫고 횃불이 하나 왔다오.
혜장과는 참으로 연분이 있는 지
절간 문을 밤 깊도록 열어 놓았다네.”
(산으로 가자꾸나. <山行雜謳> 20수 중 제15수)

백련사 대웅보전 (출처 : 강진군청 홈페이지)

1807년 봄에 지은 ‘혜장이 오다’란 시도 읽어보자.  

혜장이 오다 [惠藏至] 

굳건하고 어질고 호탕한 사람   
때로는 표연히 산을 나선다네.   
눈 녹아 비탈길은 미끄럽고      
모래 둘러싸여 들 집이 움푹하네.  

얼굴에는 산중의 즐거움 가득하고  
세월 따라 변하는 몸 마음 안 쓴다네. 
말세 인심 대개가 비루하고 야박한데   
지금 이렇게 진실 솔직한 자도 있다네.

인심이 비루하고 야박한데 선승 혜장만은 매우 진실하고 솔직하다. 이런 혜장이 정약용은  너무 좋았다. 
1807년 4월에 정약용은 “사월 초하룻날 혜장이 와서 함께 백련사에 가서 놀고 싶어 했는데 제반 준비물 때문에 그만두기로 하고 허전한 마음이 들어 이렇게 읊었다”란 시를 지었다. 
 
부드러운 술과 향기로운 안주로  하룻밤을 놀려고 했더니
녹음 덮인 관도(官道)에 갈 길이 멀고머네.

이틀 뒤인 4월 3일에 정약용은 혜장이 주지인 백련사에서 놀았다. “사월 삼일 백련사에서 놀다”란 시를 음미해보자.  

앓고 일어나 가볍게 차리고 새벽노을  헤치면서   
말을 타고 모래밭 가 어부 집을 지나가네.       
밀물 때라 들판에도 잔물결이 일고 있고         
봄은 갔어도 산에는 아직도 때 늦은 꽃이 있네.     

시를 보면 제자 이청 집에서 기거하고 있는 다산은 앓다 일어나 말을 타고 백련사로 갔나 보다.  

폐물이기에 남이 다 버려도 달게 여긴 지 오래이나 
청광(淸狂)만은 세상에다 내놓고 자랑하네.           
구름 시내 한 굽이를 간신히 지나치고             
지팡이 짚고 누대 오르니 석양 이전이네.          

청광은 그 뜻이 ‘마음이 깨끗하여 청아한 맛이 있으면서도 그 하는 짓이 상규에 어긋나다’이다. 청광한 선비는 정약용 자신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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