낙엽이 지는 날
낙엽이 지는 날
  • 문틈 시인
  • 승인 2019.11.07 09: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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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들이 울긋불긋 단풍으로 물들었다. 나는 기어이 만추의 풍경을 보러 바깥으로 나간다. 집에서 할 일이 좀 있지만 일단 자자분한 일상의 것들은 접어두고 가을 속으로 들어가려고 천변 길을 걷는다.

하늘은 높고 푸르고 공활하다. 그야말로 계절이 지나가는 하늘에는 구름 한 점 없다. 단풍나무, 상수리나무, 온갖 나무들에서 푸르름을 뽐내던 잎새들이 갈잎이 되어 바람에 날린다. 낙엽은 바람이 불적마다 우수수 허공을 휘돌며 떨어진다.

길을 걷는 내 눈에 낙엽은 인도에, 한길에 꽃잎처럼 펄 펄 낙하한다. 붉고 노란 갈잎들이 떨어지는 것을 보노라니 내 마음에는 어쩐 일인지 허전함, 쓸쓸함 같은 것이 가득 차오른다. 대자연의 어김없는 질서에 하나의 나뭇잎새까지도 저렇게 순종하다니. 이 우주를 움직이는 법칙에 만물이 고요히 조응하는 모습에서 나는 전신으로 전율을 느낀다.

가을날 오후 낙엽지는 풍경을 보면서 한해가 저무는 것 같은 깊은 상실감에 빠진다. 마치 대단원의 막을 내리는 것 같은 아쉽고 안타까운 느낌. 이미 봄부터 나는 이럴 줄을 알고 있었다.

꽃이 피고 열매가 익어 모든 것을 거두는 가을이 오면 낙엽들이 마침내 한해의 종언을 고하리라는 것을. 그렇건만 가을이 보여주는 이 조락의 슬픈 모습이라니. 왜, 가을걷이를 마친 풍요로운 가을에 사람들은 오히려 깊은 우수에 젖어드는 것일까.

누구에게보다 먼저 내 자신에게 물어도 그 까닭을 잘 모르겠다. 한해의 끝을 가을이라고 한 것은 순전히 내 생각이다. 가을 다음에 오는 겨울은 가을과 새봄 사이에 건너야 할 긴 침묵의 시공이다. 정작으로 가을이야말로 모든 것들의 끝이다.

낙엽이 흩날리는 속에서 나는 생의 우울함을 느낀다. 모든 것들이 다 이루고 떠난 텅 빈 자리에 서서 아무것도 내 것이 아닌 것들만이 남아있다. 그 속에서 나는 그 무엇, 어느 한 가지도 이루지 못했음을 문득 깨닫는다.

내가 올 한해 이룬 것이 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나는 그저 수많은 시간들을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가는 모래알처럼 흘려보냈을 따름이다. 계절은 제 할 일을 마치고 저렇게 높은 산마루를 쿵, 쿵, 넘어가는데 나는 도무지 손에 쥔 것도 어디로 향할 곳도 없는 허무함 속에서 황혼에 길 잃은 나그네 같기만 하다.

나는 허리를 구부려 길바닥에 떨어진 낙엽 한 잎을 주워든다. 한때 잎새에 새겨졌던 그 눈부신 빛과 푸르름과 비의 짙은 자취는 사라지고 가볍고 마른 갈잎의 형체만이 부서질 듯 남아있다. 낙엽들이 바람에 불려 굴러가는 소리는 우리가 모르는 세상으로 가는 소리 같다. 그 세상으로 가는 소리는 그렇게 애달프게 들린다.

가령 나무를 영원이라고 비유하고 보면 낙엽들은 무엇이겠는가. 이 세상에 태어난 뭇 생명들이라 할 것이다. 가령 사람들 개개인을 나뭇잎새에 견준다면 나무는 또 무엇이겠는가. 시작도 끝도 없는 영원이라 할 것이다.

나무와 잎새의 관계는 아무리 생각해도 그 깊은 신비를 모를 속이다. 나무는 잎새를 내어 태양빛을 머금고 열매를 맺고 그리고는 자손을 번식하려 열매를 땅으로 떨어뜨린다. 잎새는 그 일을 마치면 흙으로 돌아가고, 또다시 봄이 오면 잎새를 내고. 이 연쇄와 순환의 고리에는 끊임이 없다.

나는 그 순환의 고리에서 하나의 나뭇잎새 같은 존재라고 할 수 있으리라. 너도, 나도, 뭇 생명들이 다 그러하다. 태풍과 번개와 햇볕 속에서 푸르름으로 빛나던 잎새들의 조락은 그러므로 보통 일이 아니다. 내가 가을 속으로 가려고 길에 나선 것은 모든 낙엽들에게 인사를 보내고 싶어서다.

이 가을 세상의 모든 낙엽들에게 나는 손을 흔든다. 돌아가는 것들의 뒷모습에 손을 저어 작별한다. 모든 낙엽 한 잎 한 잎에게 안녕, 안녕이라고 말한다. 하나의 잎새는 한번 이 세상에 왔다가 떨어져간다. 생명은 딱 한번 나타났다 사라진다.

내가 좋아하는 시인 릴케는 이렇게 쓴다. ‘(…) 하지만/그 어느 한 분이 있어/이 낙하(落下)를/ 무한히 다정한 손길로 어루만져주십니다.’ 어느 한 분이 있어 이 가을의 끝을 어루만져 준다는 시인의 노래에 나는 비로소 안타깝고 쓸쓸하고 우울한 마음을 위로받는다.

가을의 끝을 받아주시는 그 어느 한 분이 없다면 나는 이 가을의 비애를 어쩌지 못할 것이다. 모든 것들은 그 어느 분의 손에서 눈을 감는다. 가을에 세상을 떠나는 영혼들도 그 어느 분의 다정한 손길이 인도해주리라. 저 허공에 휘돌다 떨어지는 낙엽들을 고이 받아주시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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