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길에서 울다
가을길에서 울다
  • 문틈 시인
  • 승인 2019.10.10 04: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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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하루 무작정 길을 나선다. 가을의 손을 잡고 싶어서다. 먼 산에서 흘러오는 개울물 소리가 야윈 풍경을 휘돌아 간다. 길에는 사람의 자취가 없고 일찍 떨어진 가을잎들이 둑길에 흩어져 있다.

이 길의 끝은 산으로 연결된다. 나는 길이 끝나는 거기까지만 갈 요량이다. 가을 햇볕이 내 등에 손바닥을 댄다. 등판이 따뜻한 느낌. 무엇을 생각하면서 갈까 하고 생각을 한다. 아무 생각도 하지 않고 걷기로 한다.

한참을 걸으니 마치 나는 그저 걷는 존재일 뿐 아무것도 아닌 듯한 느낌이 든다. 내가 원한 것은 바로 이 상태다. 나는 존재하되 내가 빠져나간, 텅 비어 있는 자리에 있고 싶은 것. 가을 속으로 걸어가노라니 시월 초순에 벌써 겨울 채비를 하는 모습들이 눈에 들어온다.

풀이며, 나무며, 산이며, 하늘까지도 색깔을 바꾸려 하는 참이다. 내가 걷는 좁은 길 양 편으로 녹색빛이 약간씩 바래져 있다. 머지않아 갈색으로, 붉은 색으로 바뀌어 온통 단풍물이 들게 될 풍경이 눈앞에 그려진다.

그 새들은 다들 어디로 갔을까. 봄과 여름내 소리하던 새들, 둥지를 짓고 알을 까던 새들, 나무등걸을 열심히 쪼아대던 딱따구리들. 산천이 조용하다. 누가 ‘시끄럽다, 이것들아’하고 엄한 꾸지람이라도 했는지 모른다. 산까마귀들 두세 마리가 여기서 저기로 날 뿐이다.

가을길은 아무리 아무 생각을 하지 않는다고 해도 무지 쓸쓸하다. 어디서 그런 감정이 솟아나는지 모르겠으나 하여튼 눈물이라도 그렁거릴 듯 무척 쓸쓸하다. 그래도 어쩔 수 없다. 나는 쓸쓸함이 잦아들 때까지 기다린다. 이때 발견하였다. 풀과 나무와 잎새들이 내게 손을 내미는 것을.

나는 가을이 내미는 손들을 하나하나 잡아주고 놓아주고 걸으면서 그러기를 반복한다. 어느 시인은 ‘가을에는 기도하게 하소서’ 하고 노래하지만 나는 ‘가을에는 울게 하소서’ 하고 기도하고 싶다. 모든 것들이 목적지에 도착해서 툭, 하고 지상에 떨어지는 소리를 남기거나 사라지거나 다음에 올 봄을 기두린다.

저것들, 길쌈하며 살아온 저 연약한 것들은 그 무엇이나 삶의 투쟁 끝에서 패배하지 않았음을 나는 목도한다. 모두가 승리자들이다. 살아남았다는 것보다 더 큰 성취, 더 큰 승리는 없다. 가을이 그 모습을 드러내 보여준다.

한 그루의 상수리나무가 뜨거운 여름을 견뎌 수 천개의 도토리를 남긴다. 만일 인간이 가로막지 않는다면 이 지구는 온통 상수리나무숲이 될 터이다. 그러므로 상수리나무는 대단한 승리자다. 나는 그 말을 상수리나무에게 해주고 싶다.

물론 한해살이풀에게도 같은 말을 전해주고 싶다. 이 세상에 태어난 모든 생명은 이미 승리를 한 것이다. 왜냐하면 모든 생명은 그 안에 승리를 품고 있기 때문이다. 풀 한 포기가 생명을 얻지 못했다면 풀잎 끝에 새벽이슬을 받지 못했을 것이다. 한 점 바람과 희롱을 하지도 못했을 것이다. 흙 속에 뿌리를 뻗어 땅의 기운을 빨아들이지 못했을 것이다.

까딱 잘못 바라보면 풀이나, 나무나, 개미나 이런 것들을 자연이 지어낸 미물쯤으로 여기게 된다. 그것들은 생각할 줄 몰라서 살아 있어도 아무런 의미가 없다고 생각한다. 하나 그것들은 대자연과 합일하고 있어서 굳이 생각할 필요가 없다. 태어날 때 이미 생각하지 않아도 그들의 어머니인 자연과 다툴 필요가 없는 존재로 지음받았기 때문이다.

아무런 생각도 하지 않고 걷는 중에 나는 사소한 기쁨 같은 것이 온몸을 휘감는 것을 알아차린다. 생각을 하지 않으면 행복하다는 것이다. 누구는 인간은 ‘생각하는 갈대’라고 하고, 또 누구는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라고 말한다.

생각에다 존재의 의미를 맡긴다. 이것은 지나친 생각주의자의 생각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자연의 침묵 속에서 태어나 언젠가는 그 침묵 속으로 돌아간다. 존재의 본질은 침묵이다.

벌써 나는 한 포기 풀의 진실을 알 것만 같다. 한 마리 개미의 존재를 이해할 것만 같다. 길은 마침내 산으로 올라가는 초입에 당도한다. 그곳엔 고목이 다된 은행나무 한 그루가 지지대의 부축을 받고 힘겹게 서있다.

은행나무는 마치 현자처럼 혹은 도인처럼 늘 그 자리에 서서 나를 기다린다. 나는 이미 은행나무와 이심전심으로 연결된다. 이 세상의 수많은 은행나무 중의 한 그루와 이 세상의 수많은 사람 중의 한 사람이 반갑게 손을 잡는다.

나는 가을길의 끝에서 수많은 가을의 손들을 잡아 흔든다. 순간 거대한 가을이 나를 포옹하는 것 같다. 계절의 침묵 속으로 나는 안겨든다. 내 눈시울에 눈물이 매달려 앞이 잘 안보인다. 나는 저것들 중의 하나다! ‘가을에는 울게 하소서’ 하는 내 기도가 응답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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