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에서 핀란드 역사를 배우다(2) 칼레발라와 핀란디아
여행에서 핀란드 역사를 배우다(2) 칼레발라와 핀란디아
  • 김세곤 역사칼럼니스트
  • 승인 2019.07.08 09:07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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핀란드 헬싱키 원로원 광장에 있는 알렉산드르 2세(재위 1855~1881) 동상을 찬찬히 본다. 동상은 4면인데 정면 위에는 알렉산드르 II, 아래는 1863이라고 적혀 있다.

헬싱키 원로원광장의 알렉산드르 2세 동상

 

원로원 광장

그런데 핀란드는 식민통치의 흔적을 왜 그대로 남겨둔 것일까? 자료를 보니 ‘알렉산드르 2세는 핀란드를 하나의 독립국가로 인정하여 의회의 구성과 핀란드어 사용을 허용했던 황제’라서 그렇단다.

핀란드는 13세기 중반이후 650년간 스웨덴의 지배를 받았다. 그런데 1809년에 러시아는 스웨덴과의 전쟁에서 이겨 핀란드를 차지했다. 러시아 황제 알렉산드르 1세(재위 1801~1825)는 핀란드를 대공국으로 인정하고 어느 정도의 자치권을 부여했다.

이런 와중에 핀란드의 지식인과 문화예술가들은 핀란드의 정체성을 자각하기 시작했다. 첫 번째 선각자는 교사인 아돌프 아르비드손이다. 그는 “우리는 스웨덴 인이 아니었으며, 러시아 인이 되지도 않을 것이다. 우리는 핀란드 인이 되자”고 말해 핀란드인의 마음에 불을 지폈다.

이어서 1835년에 엘리아스 퀸로트(1802~1884)가 핀란드 민족 대서사시 ‘칼레발라’를 발표했다. ‘칼레발라’는 핀란드 부족들의 구전 설화를 모은 것인데 사상 처음 핀란드인의 역사와 문화기록이었다. 이는 핀란드 인에게 민족 정체성을 심어주었고, 독립운동의 촉매제가 되었다.

한편, 1890년대에 들어서 러시아는 범슬라브주의 운동을 가열 차게 추진했다. 러시아 황제 니콜라이 2세(재위 1894~1917)는 핀란드를 러시아의 1개 주(州)로 편입을 시도했다. 이러자 핀란드 사람들은 강력히 반발했다. 특히 핀란드 지식인과 예술가들은 압제에 격분하였고, 1899년에 음악가 시벨리우스(1865~1957)가 ‘칼레발라’에서 영감을 얻어 ‘핀란디아’를 발표했다. 이 곡은 핀란드의 혼을 담은 음악으로 마지막 부분의 합창은 절정을 이룬다.

 

아, 핀란드여, 보라.

이제 밤의 위협은 저 멀리 물러났다.

찬란한 아침에, 종달새는 다시 영광의 노래를 부르고,

천국의 대기가 충만하였다.

어둠의 힘은 사라지고 아침햇살은 지금 승리하였으니,

너의 날이 다가왔다, 오 조국이여.

 

아, 핀란드여 일어나라.

높이 들어 올려라.

너의 과거는 자랑스럽게 등극하였다.

 

아, 핀란드여 일어나라.

노예의 흔적을 몰아내고, 새로운 세상을 보여주어라.

억압에 굴복하지 않았으니,

자랑스러운 아침이 시작되리라, 조국이여.

 

시벨리우스의 ‘핀란디아’는 이탈리아 베르디(1813~1901)의 오페라 ‘나부코’1)와 체코 스메타나(1824~1884)의 ‘나의 조국’과 비견되는 핀란드 민족 음악이었다.

이렇게 핀란드 인들이 독립운동을 활발히 전개하자, 러시아는 무력을 동원하여 진압했다. 마침내 1904년에 핀란드의 젊은 공무원 에우겐 쇼만이 러시아 총독 보브리포프를 저격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이는 1909년 10월 26일에 안중근 의사가 조선 침탈의 원흉 이토 히로부미를 하얼빈에서 저격한 사건과 비슷하다.

그런데 1905년에 러시아에서 일어난 ‘피의 일요일 사건’, 러일 전쟁에서 러시아의 패전은 핀란드에게 유리한 국면을 만들었다. 1906년에 핀란드는 신분제 국회에서 보통선거에 따른 일원제 국회로 전환시켰다. 이 선거에서 핀란드는 뉴질랜드(1893년)에 이어 세계에서 두 번째로, 유럽 최초로 여성에게 선거권을 부여했다.

1914년에 제1차 세계대전이 일어났다. 전쟁으로 러시아 국민들은 더 비참해졌고 1917년 2월 혁명이 일어나 러시아 왕조가 무너졌다. 1917년 10월에는 레닌이 이끄는 볼셰비키 혁명으로 소비에트 연방이 탄생했다. 러시아의 위기는 핀란드에게는 기회였다. 핀란드는 1917년 12월 6일에 독립 선언을 했다.2) (계속됩니다.)

옆면에서 본 알렉산드르 2세 동상(원로원 광장)

1) 특히 ‘나부코’의 히브리 노예들의 합창은 이탈리아 민중들에게 애국심을 일깨웠다. 노예 상태에서 해방되기를 기원하는 유대인들의 기도에서 이탈리아 인들은 오스트리아 제국으로부터 자유를 얻으려는 희망을 읽었다.

2) 러시아는 1918년 1월 3일에 핀란드의 독립을 인정했다. 하지만 레닌은 곧바로 핀란드 적색당을 지원하여 내전을 유발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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