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독을 찾아서
고독을 찾아서
  • 문틈 시인
  • 승인 2019.07.02 13: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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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은 늘 ‘연결중’ 상태다. 잠시라도 누군가와 연결이 안되어 있으면 불안해한다. 별놈의 휴대폰이 그 중심에 있다. 대개 혼자 있다는 것에 두려움을 느낀다.

남 말하는 대로 말하고 남 입는 대로 입고 남 하는 대로 사는 데서 안도한다. 그것은 좋게 말하면 집단 지성에 합류하는 것일 수도 있다. 실패나 성공과는 거리를 둔 무리 속의 자리다.

이것이 갖는 중요한 문제는 남이 생각하는 대로 따라 생각한다는 것이다. 그 생각에서 벗어나면 질타를 받기 쉽다. 따돌림을 받을 수도 있다. 집단의 일원이 되어 집단에 순종하는 태도라 할까. 그래서 흔히 자기 자신을 잃어버리고 산다.

나는 이것이 죽도록 싫다. 한 순간을 살더라도 남과 다른 나를 살고 싶다. 나를 살고 싶다는 말은 진정으로 나를 탐구하고 나를 완성하고 나를 존중하는 삶을 일컫는다.

내가 이런 태도를 갖게 된 데는 타고난 기질적인 부분도 있겠지만 개성을 무시하고 집단 속으로 끌어들이려는 사회적 압력에 늘 저항하려 해서일 것이다.

그 좋은 예가 있다. 직장 생활 중에 회식은 개인의 사정은 완전 무시한다. 회식에 빠지면 상사의 눈 밖에 난다. 어쩔 수 없이 합류해야 한다. 지금도 그 생각을 하면 회식 자리가 너무 불편했던 기억으로 떠오른다.

지금은 그러지 않겠지만 당시에는 1차, 2차, 그리고 3차까지 부서 직원들이 떼 지어 부장 뒤를 따라가며 새벽 한 시가 넘도록 회식이 끝나지 않던 그 시간이 내게는 악몽 같았다.

회식 분위기란 것이 개인이 빠질 수 없는 무언의 압력 속에 있다. 지금도 알 수 없는 것은 부서원 대부분은 회식에 나가기를, 2차, 3차까지 우르르 떼 지어 다니는 것을 싫어했다.

그런데도 누구 한 사람 겉으로는 그런 내색을 하지 않았다. 아니 할 수 없었다. 물론 나도 그 알 수 없는 집단 무의식에 빠져들 수밖에 없었다.

요즘이야 갓 신입사원도 회식을 말하면 “선약이 있습니다”라는 말을 먼저 내뱉는다고 한다. 여기엔 상사도 말 못하고 다른 날을 잡자고 스마트폰을 꺼내 일정을 공유한다.

그랬던 나는 직장을 은퇴하고 나서야 비로소 나를 찾는다. 나 혼자 지내는 시간이 이렇게도 좋을 수 없다. ‘일일삼성’이라는 말대로 자신을 비판적으로 들여다 볼 수도 있고, 무엇보다 남이 하자는 분위기에 휩쓸리지 않고 살 수 있어서 매우 만족이다.

고독한 시간을 나는 이렇게도 갖고 싶었던가보다. 나만의 고독이라는 방에서 내 전존재의 외로움을 깊이 음미한다. 때로는 두렵고 무섭기도 하지만 고독 속에서야말로 나는 진정한 나를 발견한다.

지금 이 외롭고 쓸쓸한 시간이 무척 귀하고 값지게 느껴진다. 혹시 나는 아파트 단지에서 사는 별난 괴짜 ‘자연인’일까.

솔직히 고백하자면 나는 이 세상에 친구가 없다. 슬프게도 친한 친구들은 모두 약속이라도 한 듯 먼저 세상을 떠났다. 그러니까 속엣 말을 나눌 친구가 1명도 없다. 오성과 한음 같은 친구가 없다는 말이다.

점심을 같이하거나 담소를 나누는 지인들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새벽 두 시에 전화를 걸어서 “지금 이 나라가 제대로 굴러가는 거야?”하고 이물 없이 속을 열어도 좋을 친구가 없다는 말이다.

‘벗을 위하여 제 목숨을 바치는 것보다 더 큰 사랑은 없다.’고 성서는 쓰고 있는데, 나는 친구도 없이 혼자 지내고 있다. 친구가 있다면 우정을 주고받는 것만으로 살아가는 데 큰 힘을 얻을 수 있을 텐데.

어쩔 수 없이 ‘유아독존’의 경지까지는 아니지만 나를 아끼며, 나를 존중하며, 그 길을 방해하는 세력을 물리치며 나는 힘겨운 나 지키기 전쟁을 하면서 외롭게 산다.

생각해보면 고독은 기피할 무엇이 아니라 오히려 개개인에게 주어진 선물과도 같다. 사람들은 대체로 그 선물 보자기를 끌러 보려하지 않는다. 선산을 지키는 한 그루 늙은 소나무 같은 독야청청한 삶이 바로 고독한 삶이다.

나는 지금에야 한 문장으로 써보지만 고독한 삶이 행복이라고 생각한다. 그렇다고 사람이 사회와 척지고 고독하게만, 외롭게만 살라고 할 수는 없는 일이다. 사람과 어울려서, 사람과 부대끼면서 살도록 되어 있다. 바로 거기가 삶이 이루어지는 현장이다.

완전히 집단을 떠나서 면벽 10년 하는 스님처럼 홀로 살 수는 없다. 내가 말하는 고독은 집단에 휩쓸려 자기가 누군인지도 잊고, 속된 압력에 굴하며 사는 삶이 아닌 삶 가운데 자기를 내세우는 자존의 삶을 말한다. 기어코 나를 잃지 않는 삶 말이다.

고독이 나를 구한다. 나는 결국 이 말이 하고 싶었던가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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