몸에서 선생 냄새가 풀풀 나도록 하시오
몸에서 선생 냄새가 풀풀 나도록 하시오
  • 시민의소리
  • 승인 2002.05.16 00:00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스승의 날 斷想>

(부제) 모든 교사가 스승일 수는 없다. 우리는 선생님들에게만 지나치게 엄격한 잣대를 들이대고 있는 것은 아닌가?


대학에 부임하던 첫 날, 임용장을 주면서 총장님은 이렇게 말씀하셨다. "최대한 빠른 시간 안에 몸에서 선생 냄새가 풀풀 나도록 하시오." 그 때 그 분이 무슨 뜻으로 '선생 냄새'라는 표현을 썼는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오늘 임용장을 받았으니 물리적인 직업으로서 교수는 되었지만 아직 까지 정신적인 스승이 된 것은 아니다. 그러니 빨리 노력해서 전문지식의 장사꾼이 아니라 참다운 사표로서의 스승이 되어라.'는 정도로 알아 들었다. 나는 아직도 내 몸에서 그 선생 냄새(?)가 나는지를 잘 모르겠다. 친구들을 만나면 이제 완전히 선생 틀이 잡혔다는 소리는 가끔 듣는다. 그러나 그 말이 칭찬인지 야유인지를 잘 모르겠다. '벌써 고리타분한 꼰대(?) 냄새가 팍팍 난다'는 뜻인지 '제법 스승다운 인간적인 향기, 매력이 있어 보인다'는 뜻인지...

나는 교사가 단순한 지식 노동자여서는 안된다고 생각한다. 교사도 노동자라는 전교조 선생님들의 주장에 동의하면서도 선뜻 박수 쳐주지 못하는 것은 그래도 교사는 일반 노동자와는 달라야 한다는 생각 때문이다. 교사가 단순히 지식을 가르쳐 주는 사람들이라면 학원강사와 다를 게 없다. 학원 강사는 학교 교사 보다 돈은 훨씬 더 많이 벌지 모르지만 교사와 같은 사회적 존경을 기대하기는 어렵다.

혹자는 요즈음 선생님들이 학생이나 학부모들로부터 무슨 존경을 받고 있느냐고 반문할 지도 모른다. 그러나 학원 강사와 학교 교사와는 우리 사회가 요구하는 도덕적 기준이 다르다. 학원 강사에게는 학식만을 요구하지만 교사에게는 학식과 덕망을 동시에 요구한다. 상당한 사회적 책임과 도덕성을 요구하고 있는 것이다. 교사에게는 지식 그 자체도 중요하지마는 지식 보다 더욱 중요한 것은 인생의 지표로서의 도덕적 인간성이다.

요즈음은 과거에 비해 교육의 기회도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다양해졌을 뿐만 아니라 인터넷으로 인해 고급 지식에의 접근성 또한 혁명적으로 높아졌다. 과거의 교육이란 이른바 先生, 먼저 나서 먼저 배운 사람이 나중 나고 나중에 배우는 사람들을 가르치는 것이었지마는 오늘날과 같은 세상에서는 이제 그러한 과거 교육의 패러다임 자체가 바뀌고 있다. 특정 분야에 대해서는 선생보다 더 많이 아는 학생들이 얼마든지 있을 수 있는 세상이 되어버린 것이다. 그래서 오늘날과 같은 지식정보화 시대에 있어서 교육자는 Learning Assistant, 그저 학생들의 학습 활동을 조금 도와주는 학습 조력자 내지는 안내자로서의 역할로 한정할 수밖에 없지 않을까? 지식이 세상 곳곳에 널려있는 소위 지식의 편재화 시대에 조금 먼저 배운 지식을 단순히 다른 사람들에게 전달해주는 지식의 전달자, 지식의 배달부이기만 하다면 그 많은 학원에 또 그 많은 학교가 왜 필요할까?

나는 안다. 내가 아무리 명강의를 해도 학생들은 그 날 강의실 문턱을 넘는 순간 거의 반을 잊어버린다. 그리고 석 달만 지나면 거의 모두를 잊어버린다는 것을. 나는 학부에서 국어국문학을 전공했지마는 했지마는 구개음화나 자음접변 하나를 제대로 설명할 수가 없다. 향가 하나 변변하게 제대로 설명할 지식도 지금 내 머리 속에는 남아있지 않다. 그러나 지금 내 가슴 속에 남아있는 것들은 대부분 강의실 안에서 배웠던 것들이 아니라 강의실 밖에서 보고 들었던 감동이나 추억들이다.

'선생인 나는 스승의 날이 싫다'는 내 글을 읽고 외국에 계시는 어떤 분은 이런 메일을 보내왔다.

"여기 대학에서는 스승과 제자의 관계가 없습니다. 단순히 교육자와 피교육자의 관계일 뿐,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닙니다. 알고있는 것을 필요로 하는 자에게 가르칠 뿐이고, 내가 필요해서 알고있는 자에게 가서 배울 뿐입니다. 이런 관계에 무슨 돈 봉투가 필요하겠습니까! 제가 본 여기의 선생님(대학포함)들은 훌륭한 인품을 가지지도 않았으며, 뛰어난 머리를 가지지도 않은 것 같습니다. 교육 제도의 차이가 있겠지만, 단지 정해진 교육 제도 안에서 규칙을 지켜가며, 흥미를 유발하거나, 계획된 내용을 알려줄 뿐입니다."

오늘날과 같은 현실에서 학교 교육이 할 수 있는 것은 그리 크지 않다. 학교 교육 보다 열배 백배 중요한 것이 가정 교육이다. 그렇지만 그 분이 말하는 외국의 이런 학교 풍경은 돈봉투나 선물에 대한 고민이 없어도 나는 조금도 부럽지 않다. 스승과 제자의 관계가 아닌 단순히 교육자와 피교육자의 관계 이런 거래 관계라면 학원과 학교를 구분해야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誠實은 하늘의 도요. 성실하고자 하는 것은 인간의 道다. 교사도 사람인지라 완전할 수는 없다. 그러나 완전성을 지향하는 모습은 보여주어야 한다. 그래서 교직은 성직이다. 그리고 교단은 제단이다. 그러기 때문에 교단에 오를 때는 옷깃을 여미는 진지함이 필요하다.

세상은 흙탕물인데 교사만은 한 송이 연꽃 처럼, 한 마리 학 처럼 고결하게 남아 주었으면... 월급은 쥐꼬리만치 주면서, 30년 전이나 지금이나 교무실 풍경은 조금도 달라진 것이 없으면서, 교사에 대한 사회적 존경심은 먹고 죽을래도 없으면서... 우리가 마땅히 해주어야할 것들은 해주지도 않으면서 교사들에게만 완전한 인격체로 남아주기를 강요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모든 조선 선비의 지향점이 처사였 듯이 물론 이 나라 모든 교사는 스승을 지향해야 한다. 그러나 경주 돌이라고 모두 옥돌일 수 없듯이 모든 교사가 스승일 수는 없다. 학생이 자라 교사가 되고 그리고 교사가 자라 스승도 되는 것이다. 우리 사회는 지금 선생님들에게 지나치게 높은 인격적, 도덕적 잣대를 들이대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

그러면 선생은 누구이며 스승, 그는 누구인가? 또 선생과 스승은 어떻게 구별될 수 있을까? 나의 기준은 이렇다. 단순한 지식의 전달자 역할만 한다면 선생이고 인생의 지표로서의 역할 까지 한다면 스승이라 할 것이다. 교실 안에서만 배웠다면 그는 선생이다. 그러나 교실 안에서 뿐만 아니라 교실 밖에서 더 많은 것을 배웠다면 그 분은 틀림없이 스승이다.

가난한 집에 제사 돌아오듯이 올해도 어김없이 스승의 날이 돌아왔다. 또 이 날 때문에 얼마나 많은 이 땅의 학생들과 학부모 그리고 선생님들이 선물을 빙자한 뇌물을 주고 받으면서 우울해질 지를 생각하면 벌써부터 가슴이 답답해진다. 스승의 날에 선생님께 드리는 물건이 선물인지 뇌물인지를 어떻게 구별하느냐는 물음에 어떤 사람이 농담처럼 이렇게 말했다. '선선히 기분 좋게 주면 선물이지만 뇌를 굴려서 주고 주고도 기쁘지 않으면 뇌물이다.'

'나도 언젠가는 선생이 아니라 스승이 될 수 있었으면... 선생으로서 맞는 <스승의 날>에 대한 부끄러움으로부터 좀더 당당해질 수 있었으면....' 이것은 그저 바램이 아니라 나의 간절한 기도다. (광주생각)

최윤식 시민기자는 광주대 언론광고학부 교수로 재직중입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