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시 향 머금은 번안시조(129) 야설(野雪)
한시 향 머금은 번안시조(129) 야설(野雪)
  • 장희구 시조시인/문학평론가
  • 승인 2019.06.18 09: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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뒤에 따라 오는 이[후배]의 이정표가 되리니

백범은 1948년 4월 19일 38선을 넘어 평양에서 열린 전조선 정당사회단체대표자연석회의와 남북요인회담은 물론 김구·김규식·김일성·김두봉의 4자회담에도 참석하고 난 후 5월 5일 서울로 돌아왔다. 그는 도착성명에서 자주적이고 민주적인 통일조국을 재건하기 위하여 남조선 단정을 반대하며 미소양군의 조속한 철수를 강력히 요구하는데 의견이 일치하였음을 밝혔다. 백범은 38선을 넘으면서 시인이 지은 시구를 인용하며 읊었던 시 한 수를 번안해 본다.

 

野雪(야설) / 임연 이양연

들판에 눈 쌓여 처음 뚫고 갈 때에는

아무렇게 이리저리 갈 일은 아닐지니

뒤따른 이정표되리 내가 가며 남긴 자취.

穿雪野中去      不須胡亂行

천설야중거      부수호란행

今朝我行跡      遂爲後人程

금조아행적      수위후인정

 

뒤에 따라 오는 이[후배]의 이정표가 되리니(野雪 / 夜雪)으로 번역되는 오언절구다. 작자는 임연(臨淵) 이양연(李亮淵:1771~1853)이다.

위 한시 원문을 번역하면 [들판에 눈 쌓인 길을 혼자 뚫고 가는 길에는 / 아무렇게나 이리저리 함부로 갈 일 아니라네 // 오늘 아침에 내가 가면서 남겨 놓은 이 자취는 / 뒤에 따라 오는 이들의 이정표가 되리니]라고 번역된다.

위 시제는 [들에 내린 눈 / 밤에 내린 눈]로 번역된다. 임연의 시문을 높이 기리는 찬시 한 수를 음영한다. [임이 주신 야설 한 수 어둔 밤길 밝히면서 / 백범의 평생 금언 가슴 속에 심었으니 / 해쳐갈 민족의 등불 잔잔하게 타옵니다.]

임영은 문장이 뛰어났고 성리학에 정통했다. 늙어서도 학문을 게을리 하지 않아 문장이 ‘전아간고’하여 후학들이 다투어 암송했다.

시인은 눈이 쌓이거나 숲이 우거진 곳을 갈 때는 아무렇게나 갈 일이 아니라고 시상을 일으킨다. 들판에 눈 쌓인 길을 혼자 뚫고 가는 길엔, 아무렇게나 함부로 갈 일 아니라라고 했다. 새로운 일에 도전을 하려면 늘 새로운 마음을 가짐을 가져야 하지 않겠는가.

화자는 밤중에 내린 눈을 밟고 가는 이 길이지만, 어찌 함부로 밟고 지날 수가 있겠는가. 그러면서 오늘 아침 내가 가며 남긴 자취 뒤에 따른 사람의 이정표가 될 것이라고 했다. 참으로 맞는 말이나 실천하기가 쉽지는 않다. 내가 한 이 일이 뒤 따라오는 사람들의 발자취가 될 수 있을 것이라 했으니 그 본이 되어야겠다는 말이다. 말 한마디 행동 하나도 뒷사람을 위해 조심하라는 가르침이다.

위 감상적 평설의 요지는 ‘혼자 뚫고 가는 길은 함부로 갈 일 아니네, 내가 가며 남긴 자취 후인들의 이정표 되리’라는 상상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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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는 임연(臨淵) 이양연(李亮淵:1771~1853)으로 조선 후기의 문신이다. 1838년(헌종 4) 충청도도사에 임명되었으며, 1842년 공조참의가 되었고, 1850년(철종 1) 동지중추부사로 승진하였다. 1851년(철종 2) 호조참판·동지돈녕부사 겸 부총관에 제수되었다.

【한자와 어구】

穿雪: 눈을 뚫고 가다. 野中: 들판 가운데. 去: 가다. 不須: 모름지기 ~해서는 안된다. 胡亂行 : 아무렇게나 다니다. 함부로 다니다. // 今朝: 오늘 아침. 我行跡: 내가 가는 길. 내가 행하는 자취. 遂爲: 마침내 ~이 되다. 後人: 뒤따르는 사람. 程: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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